오늘 하루 여행하며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필리핀 여행 경로 정리 2>
4.
두마게테 (Dumaguete)
- 아침 일찍 해변으로 간다는 바부와 작별인사를 하고 모알보알 시내에서 15분마다 한 대씩 오는 노란색 바투(Batu)행 버스에 올라타 릴로안(Liloan) 항구로. 버스비는 3 사람 200 페소. 모알보알 시내까지 트라이시클을 타고 왔는데 바부 얘기를 하니 기사가 껄껄 웃으며 바로 한다는 말이 'She's a lesbian!' 뭐야? 레즈비언이건 아니건, 그 얘기가 왜 제일 먼저 나와? 그 말 하나로 바부의 모든 걸 결정짓는 것 같아서 별로 기분이 안 좋았음.
- 릴로안 항구에서 두마게테로 가는 배를 탐. 두마게테는 세부 옆 네그로스(Negros) 섬에 있는 교육/항구 도시. 실리만 대학(Silliman University)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이 많다고. 운 좋게 바로 출발하는 배가 있어 올라탔는데 20분 정도의 짧은 항해였으나 작은 보트여서 꽤 많이 흔들림. 결국 미루가 배멀미를 하고 나도 꽤 고생함. 미루는 내리자마자 토했음. 배 값이... 얼마더라?
- 항구에 내리니 호객하는 트라이시클 기사들이 바글바글. '웨어 아 유 고잉'의 불협화음 합창을 뚫고 항구 근처 시장의 밴치에 잠깐 앉아 배멀미의 여파를 진정시킴 (우린 항상 호객 행위 무리가 있으면 귀 막고 눈 막고 무조건 전진함. 일단 빨리 벗어나고 봄) 배멀미 이거 만만하게 볼 게 아니네. 장사 없겠어. 조금 쉰 후 트라이시클을 타고 불레바드(Boulevard)라 불리는 바다 옆 도로를 따라 여러 식당, 바, 호텔 등이 쭉 있는 거리로. 카밀이 좋았다는 필로미나(Filomina) 카페로 바로 가서 저녁을 먹음. 항구에서 시내까지는 20분 정도. 70페소.
- 원래는 목적지였던 시키호르(Siquijor) 섬으로 가는 배를 바로 타는 것이었으나 또 배를 탈 자신이 없어서 두마게테에서 하룻밤 자기로 결정. 마침 비가 내려서 배 탈 기분이 없어짐. 그냥 필로미나 카페에서 비에 젖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봄. 비가 그친 후 불레바드를 따라 슬슬 걷다가 Red Doors란 호스텔이 있길래 들어가서 방 있냐고 물어봄. 방은 있는데 북킹닷컴으로 예약을 해야만 방을 줄 수 있다고. 그런데 뭔가가 꼬였는지 비어있는 방이 자꾸 예약되어 있다고 떠서 결국 다른 호스텔을 찾아야 했음. 인포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젠장, 이젠 예약 사이트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스마트폰 없으면 여행도 못 하는 세상. 여행이 예전 같지 않아. 더 돌아다니다가 쿠에존(Quezon) 공원 옆, Plaza Maria Luisa Suites Inn에 방이 있다고 해서 더 생각할 것 없이 오케이. 으허~ 이젠 배낭 메고 숙소 찾아 삼만리 하기 너무 귀찮아. 임하룡 말 대로, 이 나이에 내가 하리? (이럴 때 또 나이 따지는, 내 이름은 '꼰대') 1박에 조식 포함 1200페소. 별 두 개짜리 아주 기본적인 호스텔. 그래도 시트 깨끗하고 에어컨 잘 나오고 뜨거운 물 잘 나오니 뭘 더 바라리! 호텔 로비에 커다란 마리아 상이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음. 당장이라도 그녀가 주는 성령이 종교가 없는 내 몸마저도 감쌀 것 같았음. 할렐루야! 달리 이름이 플라자 마리아가 아니야.
- 다음 날 아침에 본 쿠에존 공원은 아주 귀여웠음. 미루는 공원 코너에 있는 놀이터에서 동네 아이들과 놀고, 카밀은 밑창이 갈라진 내 운동화와 빨래를 해결하러 감. 놀이터 옆에는 장애인을 위한 마사지 봉사활동이 진행되고 있었음. 어제 매고 다닌 배낭 때문에 나도 어깨 마사지가 절실한데, 시키호르섬에서 받아야지. 누구는 동남아 오면 1일 1 마사지한다던데, 아~ 나도 그런 럭셔리 즐기고 싶어라~ 카밀이 길거리의 구둣방에 운동화를 맡겼는데, 홍해 바다처럼 쩍 갈라진 내 운동화 밑창을 몇 번의 바느질로 감쪽같이 고쳤음. 30 페소. 빨래 찾고 다시 필로미나 카페로 가 점심을 먹음. 다른 곳 찾기 귀찮아서 간 것임.
- 불레바드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세련된 카페들이 많은데 우리가 간 필로미나 카페는 로컬 카페. Bethel Guest House 로비에 있는데 호텔이 별 세 개짜리여서 인지 외국인들이 좀 있음. 아니나 다를까, 늙은 백인 할아버지와 손녀뻘 젊은 필리핀 여자 커플을 네 커플이나 봄. 안 보려고 해도 보이니 이거 어쩌나. 아니야, 그들의 사랑은 진실된 사랑일 거야. 색안경 쓰지 말자 갖은 최면을 다 걸었으나 결국 카밀과 희한한 스토리를 만들며 뒷담화. 우리 참 못됐네 못됐어. 토마토 스프와 닭고기, 생선 등 여러 가지를 짬뽕으로 주는 세트 메뉴를 시켰는데 카밀은 좋다며 먹었으나 난 별로였음. 내 입맛에 필리핀 현지 음식은 너무 짜. 아니, 사실 동남아 모든 음식이 너무 짜. 게다가 음식이 너무 늦게 나왔어... 우리 존재가 없어지는 것 같았어.
- 타려던 4시 시키호르 타운행 배가 비 때문에 캔슬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김. 6시 라레나(Larena)행 보트에 올라탐. 큰 배였는데도 날씨 때문인지 흔들리는 게 느껴짐. 이거 잔잔하게 흔들리는 게 더 독이네. 미루랑 카밀은 멀쩡했는데 나만 항해 3시간 내내 배멀미로 완전 고생. 배낭을 끌어안고 아이고 아이고 완전 곡을 함. 배 여기저기에서 우엑 우엑 소리가 들림.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야. 티비에선 토니 자 (Tony Jaa) 주연의 무에타이 영화와 핼보이(Hellboy)가 나옴. 쓸데없는 고어(gore)는 내 배멀미를 더 악화시킴. 배 매니저가 누구니? 왜 이런 망작을 틀어주는 거야? 델토로 감독이 떠난 핼보이는 핼보이가 아니라구!
-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라레나항에 도착. 최근 몇 년간 이렇게 악몽인 시간은 없었음. 당분간 배는 사양일세. 원래 카우치서퍼와 어레인지가 되어 있었으나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냥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기로. 라레나는 시키호르섬의 다른 곳에 비해 관광객이 덜해서 게스트하우스가 별로 없음. 그나마 중년의 독일인 남자와 필리핀 여자가 운영하는 Chillout 백패커스 하우스가 있었는데 방이 없다고. 이 무뚝뚝한 독일 남자는 어떤 경유로 이곳까지 와서 게스트하우스를 열었을까? 오픈한 지 몇 달 안 됐다는데, 또 머릿속에서 온갖 시나리오가 난무하기 시작했으나 어쨌든! 밤은 늦었고 방은 없고 비는 또 올 것 같고, 고맙게도 독일 남자가 여기 저기 전화하더니 항구 바로 앞에 있는 로컬 집을 잡아줌. 트라이시클까지 불러주고 돈까지 내줌. 예약 없이 그냥 쳐들어간 우릴 빨리 없애버리고 싶었는지도.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 같음.
오늘은 여기까지.
뭐지? 그냥 두마게테에서 보낸 하룻밤 정리였는데 왜 이렇게 길어지는 거지? 무슨 보고서냐?
쿠알라룸푸르에 온 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곧 한국을 떠난지도 한 달이다. 시간아, 뭐가 그리 급하다고... 좀 천천히 가지... 너 그러다 크게 넘어진다.
오늘의 잡설 대신 여행의 잡설을 시작합니다.
여행의 여러 사진과 동영상은 instagram.com/nomadbabymiru에서 보실 수 있고, 그 전의 여행 이야기는 브런치 북 '공항에서 당신이 한 마지막 질문'과 매거진 '나는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에서 더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