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여행하며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시시껄렁할수록 심오한 여행의 잡설 #9: 어차피 떠날 외국인 - 2020/01/09>
- 오늘 하루 여행하며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1.
필리핀 여행 정리에서 잠깐 브레이크.
2.
2019년 12월 26일에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편도 티켓으로는 필리핀 입국이 어렵기 때문에 한국에서 필리핀 외에 미리 끊은 유일한 항공권이었다. 필리핀은 관광 비자 기간이 다른 나라에 비해 한 달 밖에 안 되는데 연장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구입했을 때도, 또 지낼 때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왜냐고? 글쎄... 필리핀 여행 정리할 때 더 자세히 쓰겠다. 아, 그렇다면 말레이시아는 편도 티켓으로 입국할 수 있을까? 흐흐흐... 결코 그렇지 않지.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왔을까아아~~요?! 이럴 때 쓰라고 구글이 있는 거다. 요즘 우리처럼 미리 계획 세우기에 알레르기를 일으키고 즉흥적으로 다니는 여행자들은 fake ticket을 이용한다. 즉 구입한 후 48시간 뒤에 취소되는 티켓을 사는 거다. 구글에서 onward ticket를 검색하면 서비스 제공 사이트를 쭉 볼 수 있는데 열심히 찾으면 최소 약 5유로 정도의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필리핀을 떠나기 하루 전 랜덤으로 날짜를 골라 인천행 티켓을 샀다. (하하! 인천행이라니! 그래도 한국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게 훨씬 더 말이 되잖아.) 1인당 8유로짜리 서비스, 3명 24유로, 즉 한화로 약 3만 원. 출국 날짜 잡느라 고민하느니 그냥 이 정도 투자하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게 훨씬 마음 편하다. 물론 그 티켓은 우리가 도착한 후 자동 취소됐다. 솔직히 이게 합법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사실 불법일 이유도 없다. 그냥 편법일 뿐이다.
3.
점점 편도 입국이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동남아가 그렇다. 편도 티켓으로는 아예 비행기 탑승을 거부당하거나 비자 기간 내에 말썽 안 피고 나라를 떠나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당할 수도 있다. 혹시 생길지도 모를 문제에 대해 항공사가 책임지기 싫은 거다. 태국의 치앙마이니 인도네시아의 발리니 이른바 디지털 노마드의 허브라고 불리는 곳들이 인기를 끌다 보니 빨리 나가줬으면 하는 외국인들이 안 나가고 들러붙어서 그런가?라고 나름의 추측을 해본다. 아예 입국할 때부터 언제 떠나는지 확실히 알고 싶은 거겠지. 외국인은 그냥 놀러 와서 돈 펑펑 쓰고 가주면 땡큐인 거다. 이것저것 귀찮게 그들의 체류까지 신경 써가며 다 받아주고 싶지 않은 거다. 유럽 같은 서구 열강만 외국인 거부하는 줄 알았지? 아시아 국가도 어지간히 외국인에게 까다롭다. 서양인이건 아니건 상관 없이 자국민이 아니면 다 싫은 거다. 우리나라 비자법이 얼마나 복잡한지 안다면 달리 유럽 욕할 게 없다. 난민 문제에 발끈하는 것부터 보라고. (사실 난민 문제는 워낙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라 이렇게 함부로 단정 지을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4.
필리핀 후 말레이시아로, 그중 쿠알라룸푸르로 다음 행선지를 정한 이유는 순전히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망원동 우리 집에서 근 3주를 머물렀던 카밀의 독일인 친구가 마침 이곳에 있었고 또 예전에 카밀을 호스팅 했던 카우치서퍼가 자기가 주도하는 공유 경제 프로젝트를 같이 하자며 카밀을 반겼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새해를 같이 맞을 줄 알았던 독일인 친구는 우리가 오기 전에 태국으로 떠나버려서 만날 수가 없었고 (현지인 여자 친구에게 차였다나 뭐라나. 이 친구도 스토리가 길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72세 중국인 할아버지 호스트 에릭은 알고 보니 같이 일하기에 참으로 힘들고 까다로운 사람이어서 사이가 틀어지기 직전이다. 좋은 호스트라고 해서 같이 일하기 좋은 동지로 발전한다는 법은 없나 보다. 아직까진 우리나라로 치면 '미도' 혹은 '동산 아파트' 정도로 불릴만한 에릭의 아파트에서 지내지만 곧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아 옮겨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계속 쿠알라룸푸르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질문이 들겠지? 그런데 있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이 도시는 정말 매력적인 도시다. 모든 게 크고 사방이 공사 중이고 서울을 능가하는 쇼핑몰과 콘도미니엄 아파트로 가득하고 차가 있어야만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복잡한 도시지만, 그래서 망원동 같은 정서를 좋아하는 우리에겐 안 맞을지도 모르지만, 얇은사 하이얀 고깔을 살짝 들추면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역사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고이 접어 훨훨 나비우니, 이 매력을 좀 더 알고 떠나야겠다. 말레이시아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졌다.
5.
어차피 우리 같은 여행자는 그냥 치고 빠져야 할 운명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onward ticket으로 어디든 떠나면 그만이니까. 한 달이든 삼 개월이든 머물 수 있는 비자 기간은 정해져 있고 그 한정된 시간 안에 어떤 인연을 만드는지는 순전히 타이밍과 운과 여행자의 행동(action)에 달려있다. 필리핀에서처럼 철저히 관찰자 입장에서 그들이 제공하는 최대치만 취하고 떠난다면 모든 게 간편하고 에너지 소모가 덜하겠지만 그 깊이가 깊건 얇건 약간의 관계 맺기를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지고 한층 흥미로와진다. 카밀의 친구와 만나지 못했고 에릭과의 협력은 실망스러웠지만 (에릭 이야기는 다음에) 덕분에 이 도시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또 다른 소중한 인연을 만들었다. (채리티 트레블 프로젝트를 할 때부터 인터넷 상으로 계속 우리를 응원했던 인도계 영국 친구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어느덧 보르네오 섬 출신의 말레이시아 여성과 가족을 이루어 쿠알라룸푸르에 살고 있었다. 페이스북으로 우리의 행보를 접한 그는 바로 카밀에게 연락했고, 그들은 우리와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았다. 에릭과 대화하다가 이들과 대화하니 어찌나 숨통이 뻥 트이던지! 심지어 그의 쌍둥이 딸들과 미루가 같은 2013년 생이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벌써 3번이나 만났고 미루의 생일에도 이들과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말레이시아 입장에선, 아니 동남아 어느 국가에서건 우린 삼 개월 안에 돈 쓸 거 다 쓰고 나가줬으면 하는 외국인일 거다. 돈을 쓰고 안 쓰고는 우리 재량이지만, 나갈 땐 나가더라도 말레이시아에서만큼은 다음에 다시 오고 싶게 만드는 인연을 최대한 만들고 나가고 싶다. 허무하게 끝날 인연일지언정 여행지에서 누구를 만나느냐는 그 여행지의 인상에 아주 치명적이니까. 이단 호크는 그렇게 줄리 델피를 만나 같이 밤거리를 헤매고 해돋이를 맞아하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비엔나는 어떤 의미이던가!
오늘은 여기까지.
사실 쿠알라룸푸르의 첫인상에 대해 쓰려고 첫 문장을 열었는데 어찌하다 이야기가 이리로 흘렀네. 쓰던 중 옆에서 카밀이 에릭과 문자를 주고받다가 에릭과 말이 안 통해서 미치겠다며 길길이 뛰어서일 거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같이 프리젠테이션을 하기로 되어있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론 그냥 손 땠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욱하는 성격인 카밀이 에릭에게 쓸데없는 말실수나 하지 않도록 중간에서 잘 우쭈주 해야겠다.
오늘의 잡설 대신 여행의 잡설을 시작합니다.
여행의 여러 사진과 동영상은 instagram.com/nomadbabymiru에서 보실 수 있고, 그 전의 여행 이야기는 브런치 북 '공항에서 당신이 한 마지막 질문'과 매거진 '나는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에서 더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