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수영장이 있고 없고의 차이 - 20/01/17

오늘 하루 여행하며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시시껄렁할수록 심오한 여행의 잡설 #10: 수영장이 있고 없고의 차이 - 2020/01/17>

- 오늘 하루 여행하며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1.

다시 시작하는 여행길, 보고 느끼는 것이 넘쳐서 술술 잘 써질 줄 알았다. 할 말이 얼마나 차고 넘칠까, 하루가 마다하고 사람들이 '쟤 왜 저래?' 하며 질릴 때까지 주야장천 뭔가를 올리겠지? 그런데 아니더라. 오히려 그 하고 싶은 말에 압도되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오래 여행하다 보면 당장에 보이는 것 너머의 스토리를 찾게 되는데, 내 지식과 사유의 얄팍함에도 짜증이 나더라. 설상가상으로 슬슬 재미없고 시큰둥해지는 SNS. 소통이 목적이라지만 과시와 관음의 복합체인 이곳에, 이미지 하나로 글 몇 페이지를 퉁치는 이곳에 이리 올려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쿠알라룸푸르의 마천루 아래 신나게 종횡무진 다니는 미루를 미소로 바라보며 난 그냥 조용히 내 여행을 음미하고 싶어 졌다. 표현하고 싶어서 안달이 아닌, 내 안에서 꼭꼭 씹은 다음 삼키고 싶어 졌다. 그래야 배탈이 안 날 것 같았다. 뭐든 차고 넘치면 탈인 법이다.



2.

솔직히 욕심은 많다. 필리핀 그림도 그리고 싶고 아주 저렴한 미루의 여행 동영상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고 싶다. (편집 기술 짱짱한 유튜브의 바다에서 난 거기에 대항할 여력도 마음도 없다.) 하지만 급하면 뭐하나.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고, 이 모든 걸 혼자 하기엔 내가 내 여행을 충분히 소화도 못하고 있는데. 게다가 난 카밀과 미루와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지 않은가. 미루랑 놀아주고 어디 가고 가르치다 보면 소화고 자시고 그냥 하루가 훅 간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한 바가지였지만 한동안 내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가짜 피아노만 쳤다. 그냥 몇 시에 뭐했다는 팩트를 정리한 일기만 간신히 이어갔을 뿐. 잡설 #1, 2에서도 기다려야겠다고 썼는데, 아직 더 기다려야 하는 건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 글이고 나발이고 미루고 미뤘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나 보자! 하고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보면서 아, 역시 글은 타고나야 하는 건가 싶다가도 퐁퐁퐁 솟아나는 영감의 전염성에 기분이 좋아졌다. 낮에는 못 보고, 며칠 밤을 거쳐 드디어 어제 정주행을 끝냈는데, 어머나, 내가 원했던 게 이거였나? 동백이의 스토리가 가슴 벅참과 동시에 글을 쓸 용기를 준다. 글 퀄리티가 개발새발이든 간에. 결국 내가 찾던 건 스토리였나? 오늘 뭐 했고 뭘 먹었고는 스토리가 아니다. 내 여행의 스토리를 뭘까? 그걸 찾아야겠다.



3.

요즘 우리 생활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쿠알라룸푸르로 와서 근 2주 동안 카우치서핑 호스트인 에릭의 집에 머물며 카밀은 에릭의 공유 경제 프로젝트를 도왔고 난 미루를 전담했다. 에릭과 프레젠테이션을 끝낸 후 우리는 시내 쪽 제일 인기 있는 동네인 부킷 빈탕(Bukit Bintang)에 에어비앤비 스튜디오를 24일까지 랜트했다. 알고 보니 라마다 호텔 안에 있는 레지던스여서 어쩌다 호텔에서 사는 럭셔리를 누리고 있다. 50만 원 조금 안 되는 돈으로 2주 동안 시내 한 복판에, 깨끗한 공간에, 멋진 시티 뷰에, 수영장과 피트니스, 자쿠지를 누릴 수 있다니. 동남아니까 가능한 얘기다. 마침 4일과 12일이 미루와 카밀의 생일이었어서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고 네덜란드의 작은 출판사와 시집 출판 계약을 한 카밀이 이달 말까지 초고를 끝내야 하기에 카우치서퍼 집에 있기보단 우리만의 편한 공간이 필요했다. 현재 아주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아침 9시쯤 일어나 미루와 같이 15-20분 아침 요가를 하고 아침을 먹은 후 2시간 정도 홈스쿨링을 한다. 그 후 점심을 먹고 수영을 하고 밖으로 나간다. 카밀과 내가 하루씩 돌아가며 미루를 데리고 나가는데 솔직히 미루는 종일 수영장에 있어도 행복하다. 덕분에 쿠알라룸푸르 내에 아이들 데리고 가기 좋은 곳을 잘 알게 되었다. 카밀은 계속 글을 쓰고 번역 일로 돈을 번다. 난 빨리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헤매고 있다. 우린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이건 스토리가 아니다.



4.

제목은 '수영장이 있고 없고의 차이'인데 딴 얘기만 늘어놓고 있네. 뜬금없겠지만 그래서 결론은 수영장이 있어서 너무 좋다는 얘기다. 이곳은 웬만한 콘도미니엄 아파트엔 다 수영장이 있는데 에릭의 아파트에도 수영장이 있었고 여기 호텔에도 수영장이 있다. 그리고 수영장이 있고 없고가 주는 생활수준의 차이는 진짜 엄청나다. 사람이 환경의 동물이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찌 이리 다를 수가 있나. 사실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그걸 제대로 즐기려면 사람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뉴욕에 살면 뭐하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한 번 제대로 안 가게 되는 것을. 마찬가지로 바로 옆에 수영장이 있어도 안 가려면 충분히 안 갈 수 있는데, 이곳의 날씨와 미루의 성화는 가지 않으면 큰일 나게 만든다. 말레이시아에 온 후로 거의 매일 수영을 했다. 튜브 끼고 통통통 발장구 치는 미루를 옆에 두고 자유형, 평형, 배영으로 왔다 갔다 물살을 갈랐다. 한강 따라 미친 듯이 달렸던 그때의 희열이 다시 찾아왔다. 수영으로 운동을 하게 될 줄이야. 이거 이거 완전 눈 버렸네. 앞으로 수영장 있는 숙소만 찾으면 어쩌나. 지금 누리는 이 럭셔리를 버리지 못하면 어쩌나. 이거 완전 간땡이가 부어버렸네.


(우리나라도 아파트에도 이렇게 수영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안 되겠지? 더운 나라니까 사시사철 밖에서 수영하는 게 가능하니 있는 거겠지? 관리비가 얼마나 들겠어. 또 쓰는 사람만 쓸 거고, 결국 쓸데없는 관리비 더 낸다고 주민들이 민원 넣어서 문 닫고 말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아침에 2시간씩, 정 안 되면 1시간씩 홈스쿨링을 하는 건 진짜 도전이다. 노는 게 세계 최고로 좋은 아이를 붙들어 놓고 알파벳을 읽게 만드는 건 엄청난 수련과 내공을 요구한다. 1초를 마다하고 다 때려쳐! 라는 마음의 소리가 메아리치지만,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자, 미루야, 잘 봐봐~라고 말한다. 솔직히 하루 쓸 에너지를 매일 아침 이 2시간에 다 쏟는 셈이다. 이러니 글 쓸 힘이 남아있을 리가 있나! 필리핀 여행, 에릭과의 이야기, 쿠알라룸푸르 인상 등 쓸 얘기가 한 바가지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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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잡설 대신 여행의 잡설을 시작합니다.

여행의 여러 사진과 동영상은 instagram.com/nomadbabymiru에서 보실 수 있고, 그 전의 여행 이야기는 브런치 북 '공항에서 당신이 한 마지막 질문'과 매거진 '나는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에서 더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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