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여행하며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시시껄렁할수록 심오한 여행의 잡설 #12: 필리핀 여행 경로 정리 3 - 2020/01/25
- 오늘 하루 여행하며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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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여행 경로 정리 1, 2에 이어서,
https://brunch.co.kr/@yellowduck/171
https://brunch.co.kr/@yellowduck/17https://brunch.co.kr/@yellowduck/172
모알보알, 두마게테를 지나 시키호르(Siquijor) 섬으로 갔음. 1, 2와 마찬가지로 계속 음슴체로 쓰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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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키호르섬 (Siquijor)
- 시키호르섬에서 2019년 12월 16일 밤부터 12월 23일까지 있었음. 한국인들에겐 덜 알려진 섬이라고. 나도 보홀이나 보라카이는 들어봤지만 시키호르는 처음 들었는데 카밀이 현지인의 추천을 받아 간 곳임. 라레나(Larena) 항구에 도착한 날 밤은 항구 앞 로컬 집에서, 그 후 이틀 밤은 카우치서퍼 집에서 잤고 그 후엔 산후안(San Juan) 마을로 옮겨 Bell's Beach Resport라는 로컬 리조트에서 지냈음. 하룻밤에 1200페소. 살짝 예산 초과였지만 부엌, 세탁기 다 있는 벙갈로였음. 부엌 용품이 좀 부족한 게 아쉬웠지만 '로컬' 리조트라는 걸 감안하면 나쁘지 않았음. 주변에 서양 관광객을 겨냥한 고급 리조트들이 많았거든. 우리 벙갈로 앞에 모래보다 돌이 더 많은 미니 비치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스쿠버다이버들이 애용하는 길이었음. 거기가 좋은 출발지인가 봄. 머리부터 발 끝까지 검은색 고무 다이버복으로 무장한 다이버들이 아침 일찍부터 무거운 산소통을 매고 씩씩거리며 가는 모습이 '이 좋은 곳까지 와서 왜 굳이 저렇게 군대 훈련을 하나' 싶어서 웃음이 났음. 하지만 바닷속을 유영한다는 건 분명 엄청난 희열일 것임. 카밀이나 나나 이런 액티비티에 큰 관심이 없는 게 아쉬울 뿐. 벨스 비치에서 진짜 오랜만에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졌음. 해가 떴구나, 해가 중천이구나, 해가 지는구나, 밤이구나, 했음. 그래도 며칠이 순식간에 가던걸. 물론 끊임없이 놀이를 추구하는 미루 때문에 바닷속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그 정도면 진짜 아무것도 안 한 것임. 아무것도 안 했는데 죄책감을 안 느낀 건 나에겐 참으로 고무적이었음. 난 항상 무언가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거든. 엄청 게으르면서도 그 게으름에 죄책감 느끼고 말이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는 여행밖에 없는 것 같음. 이래서 여행하나.
- 배 타고 시키호르섬에 올 때 뱃멀미로 엄청 고생했는데, 배에서 틀어준 영화 '핼보이'는 정말 날 핼로 이끌었음. 그런데 그 다음날 브런치를 먹은 식당에 핼보이에 나올 법한 캐릭터의 대머리 서양 남자가 아침부터 취한 채로 늘어져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어젯밤의 뱃멀미와 핼보이 악몽이 생각나 정말 많이 웃었음. 이제 핼보이 시리즈는 다시 안 나왔으면 좋겠음.
- 처음 며칠은 높은 습도를 적응 못해 축축 쳐져있었음. 속상하게 비가 계속 오더라고. 원래 12월에 비가 많이 온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뭐. 엄청 더웠음. 계속 32도를 유지. 화창한 날엔 햇빛이 너무 세서 밖에 나가기가 무서웠음. 가뜩이나 생긴 게 현지인 포스인데 까맣게 더 탔으니 완전 필리핀인 됐음. 알 유 필리피노?라고 물어도 그들을 탓할 수가 없음. 피부 관리 좀 잘할걸. 선크림을 아무리 발라도 소용이 없네. 항상 말하지만 내 인생에 크게 후회하는 두 가지는 젊었을 때 피부관리 안 한 거랑 운전 연습 안 한 거임. 그런데 운전은 평생 가도 안 할 것 같음. 난 쫄보거든. 너무 무서워. 짧은 내 다리는 브레이크에도 닿지 않는단 말이야. 10센티 통굽을 신어도 안 닿아. 자전거야 아동용 자전거를 타겠다만 (그것도 안 탄지가 어언.... ㅜㅜ) 대기업이 키 작은 사람들을 위해 따로 자동차를 만들 리가 없잖아. 키 작은 사람으로 산다는 거엔 전혀 불만 없지만 (오히려 난 내 작은 키가 좋음) 이 세상은 단신인 사람에게 전혀 친절하지 않아. 리스트를 데라면 끝도 없지. 키 작은 사람, 키 큰 사람, 팔이 긴 사람, 다리가 짧은 사람, 발이 큰 사람, 어깨가 넓은 사람, 얼굴이 큰 사람, 모두 각자 나름의 소수자겠지. 이 세상은 소수자로 가득 찼네... 그런데 나 지금 뭐라는 거니?
- 우리를 호스팅 한 카우치서퍼 MM은 시키호르섬 출신으로 두마게테의 실리만 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한 젊은 여성.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 이탈리안 남자 친구가 있는데 장거리 연애 2년째라고. 얼마 전까지 시키호르에서 6개월을 같이 살았다고 함. 장거리 연애 경험자로서 ('내가 해봐서 아는데') 모든 장거리 연애 커플들 화이팅! 그거 정말 쉽지 않거든. 전공은 회계학이지만 그쪽 일은 하고 싶지 않고 지금은 시키호르섬의 여러 모습을 찍어 유튜브와 소설 미디어에 올린다고 함. 오토바이를 탈 줄 몰라서 항상 오토바이 있는 사촌이나 친구를 불러야 한다고. MM의 안내로 같이 오토바이 타고 섬 한 바퀴를 돌았는데 얼굴에 바람맞으며 달리는 기분이 정말 좋았음. 시키호르는 섬이 작아서 하루 날 잡고 오토바이로 돌면 관광지 여러 곳을 가며 다 돌 수 있음. 오토바이 렌탈은 라레나 항구에 있는 Sea Breeze Lodge & Motorbike Rental에서. 하루 렌탈 350 페소. 오토바이를 탈 수 없으면 트라이시클이나 지프니를 타야 하는데 가격 협상을 잘해야 함. 로컬들은 지프니를 20페소에 타지만 관광객들에겐 두 배의 가격을 부름. 라레나에서 산 후안까지 들었던 트라이시클 비용은 100페소.
- 시키호르섬에서 추천할만한 곳.
Baha Bar: 관광 붐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키호르섬에서 최근에 생긴 아주 세련된 라이브 뮤직바. 돼지고기 씨즐링이 무척 맛있었음. 그런데 사람이 많아서 종업원 부르기가 꽤 힘듦.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서비스가 느림. 주문받는 거 기다리다가 혈압 올라 뒷목 잡음. 사람을 피해 조식을 먹거나 저녁을 먹으려면 5시쯤 가는 게 좋음.
Larena Triad: 라레나 타운 근처 산 정상에 있는 카페. 조망이 아주 좋음.
Lagaan Falls: 시키호르에서 폭포는 캄부가하이 폭포(Cambugahay Falls)가 가장 유명한데 우린 거기 안 가고 사람들 많이 안 가는 라간 폭포를 갔음. 결과는 사람 별로 없고 우리끼리 너무 재밌게 놈. 미루는 로컬 아이들과 아주 잘 놀았음.
Little Molmol Pizza: 프랑스 남자가 운영하는 피자집으로 라레나에 있음. 오랜만에 맛보는 정말 맛있는 피자였음.
참고로 라레나는 지극히 로컬이고 섬 남쪽의 산 후안(San Juan)에 리조트, 식당, 스쿠버다이빙 등 여행자를 위한 시설들이 다 몰려있음. 로컬 좋아하는 우리에겐 라레나가 딱 맞았음.
오늘은 여기까지.
쓰다 보니 의식의 흐름 때문에 자꾸 이야기가 세는데 그게 잡설의 정석인 것 같아서 딱히 막고 싶은 생각이 없음. 오히려 좋네. 근 2주 간의 호캉스를 끝내고 차이나타운의 한 게스트하우스로 옮겼는데 다른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음. 하지만 게스트하우스 라운지에서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싱가포르에서 공부하는 20대 초반 미국 교환 학생 6명이 수다를 떨고 있는데, 그 엑센트가 너무 미국적이어서 말을 섞고 싶지가 않음. 모든 발음을 굴리는 아주 강한 미국 엑센트를 오랜만에 들으니 신선함과 동시에 질림. 이런 편견에 가득 찬 꼰대 같으니라고. 이래서야 인터내셔널 트레블러라고 부를 수 있겠어?
오늘의 잡설 대신 여행의 잡설을 시작합니다.
여행의 여러 사진과 동영상은 instagram.com/nomadbabymiru에서 보실 수 있고, 그 전의 여행 이야기는 브런치 북 '공항에서 당신이 한 마지막 질문'과 매거진 '나는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에서 더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