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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추럴 본 트래블러 - 19/12/24

오늘 하루 여행하며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내추럴 본 트래블러>


1.

여행 15일째. 아직까진 미루는 뭐든 재밌다. 다시 한국 가잔 얘기는 없다. 한국은 추운데 여긴 따뜻해서 좋단다. 따뜻하다기보단 너무 더워서 문제지만. (진짜 왜 이리 중간이 없나!) 계속 움직이는 게 힘들지 않냐니까 '왜? 재밌는데!' 한다. 진작에 알긴 했지만, 진짜 이 녀석 '내추럴 본 트래블러'인가? 또 한국의 어린이집 친구들은 곧 학교를 가지만 자기는 안 가도 돼서 좋단다. 내가 딱히 학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 적이 없음에도 자기가 먼저 이렇게 말한다. 학교란 단어는 어쩔 수 없이 태생적으로 거부 대상인 건가. '학교 가지 않는 미루'를 어떻게 교육할지 카밀과 나의 어깨가 무거워진다. 거기에 대해선 다음에 따로 쓰련다.



2.

필리핀과 한국은 다르다는 걸 확실히 이해하는 것 같다.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여기는 필리핀이잖아. 당연히 다르지.' 한다. 그렇게 말하는 톤이 필리핀을 격하하지 않는 톤이라서 다행이다. 한국은 한국이고 필리핀은 필리핀일 뿐. '다름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는데 여행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라는 내 지론은 여전하다.



3.

- 엄마, 물 마시고 싶어.

- 가서 달라고 해봐.

- (식당 스탭에게 가서) Can I have a glass of water please?


- 엄마, 쉬야하고 싶어.

- 가서 화장실이 어디인지 물어봐.

- (식당 스탭에게 가서) Do you have a toilet here?


- (어디선가 네덜란드어가 들리면) 엄마, 네덜란드어다!

- 인사하고 싶으면 가서 인사해.

- (다가가서) Can you speak Dutch? 혹은 Where are you from? (네덜란드인이라는 걸 확인하면 바로 네덜란드어로 대화 시작. 자기는 네덜란드어, 한국어, 영어를 할 수 있다고 자랑하는 건 기본. 웃긴 건 자기를 꼭 I'm Korean이라고 소개한다는 사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이거 아는 당신은 구세대! ㅎㅎㅎ)



4.

한참 친구가 좋을 나이인 미루는 아이를 볼 때마다 먼저 다가간다. 어딜 가더라도 같이 놀 아이들을 찾고 없으면 왜 없냐고 내게 심통을 부린다. (나보고 어쩌라고!) 하나 신기한 건 필리핀 로컬 아이들과는 허물없이 바로 같이 놀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굳이 언어가 안 통하더라도 그냥 몇 가지 행동만으로도 까르르 웃으며 잘 논다. 숨바꼭질을 할 수도 있고 흙에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미루가 가지고 온 장난감으로 소꿉을 할 수도 있다. 반면 여행 온 다른 외국인 가족(대부분 유럽인)의 아이를 만났을 때 미루가 다가가서 인사를 하면 그들은 반응 없이 멀뚱히 쳐다보거나 부모를 찾거나 아예 무시한다. 그건 부모의 태도와도 연결이 되는데, 로컬 아이들의 부모와는 단 몇 분일지라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즐거운 대화가 이어지는데 외국인 아이의 부모는 우리가 먼저 인사해도 딱히 반응이 없거나 형식적인 짧은 인사만 하다가 끝난다. 얼굴에 미소가 있고 없고의 차이. 이 차이점은 어디서 시작되는지, 진심 모르겠다.

마침 카밀은 오늘 자신의 페이스북에 네덜란드인의 차가운 태도를 꼬집는 농담을 아래와 같이 썼다. 여행에서 만나는 네덜란드인에 대해 카밀은 꽤 부정적이다.

Travel tip #1
How do you recognize a Dutch person?
You shout "goedemorgen"
If they say "sorry, I don't speak that language", they are not Dutch.
If they ignore you, they are Dutch.



5.

물론 놀다가 뾰로통해질 때도 있다. 조금 전에도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딸과 놀다가 (필리핀 아이) 그 아이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망쳤다며 뿔이 잔뜩 나서 내게 왔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지금 놀 친구는 그 아이밖에 없는걸. 친구가 모르고 그랬을 수도 있다고 달래준 후 다시 가서 같이 놀라고 토닥였다. 몇 분 후 언제 그랬냐는 듯 까르르 소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루가 좋아하는 엄마 놀이다. 언제나처럼 미루는 아기 역할이었다. 앞으로 친구가 없어도 혼자 잘 노는 힘과 지루함과 심심함을 견디는 내성을 길러야 할 텐데, 어른에게도 힘든 일을 아이에게 요구하려니 미안해진다. 하루에 10분이라도 같이 명상을 해볼까?



6.

이렇게 말하니까 미루가 한도 끝도 없이 착한 아이인 것 같은데, 아이는 그저 아이일 뿐이다. 요즘 왜 이리 말을 안 듣는지, 한 번 말할 때 바로 들은 적 없이 꿈지럭거리고, 자꾸 핸드폰으로 동영상 보고 게임하려 하고, 채소랑 밥 대신 단 거랑 팬케이크만 먹으려고 하고, 밤에 안 자고 버티려고 해서 내 혈압이 널을 뛴다. 말대꾸는 또 어찌나 따박따박 하는지. 실컷 화나게 해 놓고선 '엄마아~ 스마아~~일!' 한다.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고! 어우, 이 웬수!



7.

과연 언제까지 이 내추럴 본 트래블러 모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앞으로 미루가 여행하며 경험할 모든 것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오늘은 여기까지.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딱히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은 건 그냥 내 기분인가? 날이 따뜻해서 그런가? 심지어 내일 태풍이 온단다. 26일에 쿠알라룸푸르로 가는데, 제발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결항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분위기는 안 나지만 그래도 다양한 폐품(플라스틱 물병, 비닐, 빨대, 옥수수 껍질 등등)을 이용해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가 곳곳에 있어서 재미나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는 사람들이 그나마 지금이 크리스마스 시즌이란 걸 자각하게 해 준다.

Real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어젯밤 바로 옆에서 제대로 들었는데, 그 소리가 아직 귓가에서 머문다. '옥자' 저리 가라였다. 그 얘긴 다음 잡설에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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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잡설 대신 여행의 잡설을 시작합니다.

여행의 여러 사진과 동영상은 instagram.com/nomadbabymiru에서 보실 수 있고, 그 전의 여행 이야기는 브런치 북 '공항에서 당신이 한 마지막 질문'과 매거진 '나는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에서 더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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