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어디 보자… 그날이 언제더라. 코로나 시대에는 다 그날이 그날 같아서 한참을 되짚어야 한다. 때는 바야흐로 2020년 3월 17일, 태국의 끄라비. 우리가 머물던 친구의 집에는 다른 여행자들도 있었는데, 가볍게 지나갈 줄 알았던 코로나가 심각해지자 다들 초조해졌다. 다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돌아간다면 어떻게? 그냥 버틸까? 사정없이 내리쬐는 태국의 노란 햇빛과 후덥지근한 습기가 숨을 조이던 그날, 긴장감 돌던 친구 집의 공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상황 1.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쓴 폴란드 출신 M이 손톱을 깨물며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 작지만 단단한 몸의 그는 항상 팔 굽혀 펴기, 플랭크 등 시범을 보이는 뻐기기 대장이다. ‘형사 콜롬보’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악센트가 잔뜩 들어간 영어를 말하는 모습이 무척 귀엽다. 안절부절못하는 그와 달리 여자 친구 A는 옆에서 휴대폰만 보고 있다.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항상 조용히 미소만 지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M이 이렇게 초조한 이유는 비행기 때문이다. 그는 나머지 휴가 일정을 취소하고 걸 수 있는 모든 항공사에 전화해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찾고 있다. 폴란드가 국경을 봉쇄해서 집으로 갈 길이 막혔지만 최소 유럽 땅 어디라도 밟아보자는 심산이다. 간신히 카타르 항공사의 마지막 베를린행 비행기를 찾아낸 M은 상담사와 연결 중이니 잠시만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을 휴대폰 너머로 근 한 시간째 듣는 중이다. 불안에 영혼이 잠식된 표정의 그와 달리 될 대로 돼라 SNS만 보는 A 표정이 사뭇 대조적이다.
- 굿 애프터눈, 카타르 에어라인.
앗, 사람 목소리다! 제풀에 꺾여 끊게 만드는 게 안내 방송의 목표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사람이 받는구나. M은 온몸을 던져 빛의 속도로 전화기를 낚아챈다. 기필코 이 비행기를 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동작이다. 원래 빠른 그의 말이 더 빨라지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더 가늘어진다. 통화가 진행될수록 굽은 그의 어깨가 펴진다. 미간의 일자 주름도 펴지고 마침내 함박웃음이 얼굴을 덮는다. 아, 하늘이 감복했구나. M이 휴대폰이 부서져라 외친다. 땡큐! 땡큐! 땡큐! 그리고 마치 록키처럼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는다. 할렐루야, 나무아미타불, 인샬라.
후에 이들은 끄라비에서 푸켓으로, 푸켓에서 방콕으로, 방콕에서 베를린으로, 베를린에서 폴란드로 가는 긴 여정을 마치고 집에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승리의 브이를 그리며 활짝 웃는 사진이었다. 드디어 집에 간다는 안도감이 얼굴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상황 2
같은 시각, 집 밖의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은 D를 본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라디오 PD이자 싱글 맘인 그녀는 흥분한 M의 목소리가 거슬린다는 듯 담배만 뻑뻑 피우고 있다. 너무 바쁜 생활에 번아웃이 되어 직장에 휴직서를 낸 후 13살 된 아들을 엄마에게 맡기고 생애 처음 혼자 해외여행을 떠난 그녀다. 그 첫 도착지가 끄라비였는데, 하필 시작과 동시에 코로나가 터지다니! 어디에도 갈 수 없게 된 이 상황이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서핑으로 그을린 그녀의 매끈한 갈색 손가락 사이로 담배꽁초가 차곡차곡 쌓인다. 그녀의 휴대폰이 울린다. 엄마로부터 온 국제 전화다. 분명 그녀의 엄마는 이 시국에 여행이라니 미쳤냐, 빨리 돌아와라, 타박했을 거다. 하지만 D는 고개를 젓는다. 어떻게 떠난 여행인데, 떠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대로 멈출 수 없다고 한다.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격앙되는 목소리로 어떤 분위기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논쟁은 계속되고, 그녀는 지쳐가고, 그럴수록 담배는 산이 된다.
이틀 후 그녀는 같이 있자는 우리의 권유를 뿌리치고 북쪽으로 떠났다. 히치하이킹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어찌어찌 방콕까지 갔으나 그만 방콕이 전면 록다운이 되는 바람에 그대로 그곳에 갇혀버렸다. 밖에도 못 나가는 방콕의 숙소에 갇히는 것보다는 최소 바닷가에는 갈 수 있는 끄라비에 갇히는 게 더 나았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상황 3
반면 V와 R은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기에 바쁘다. 될 대로 돼라, 끄라비의 아름다움을 더 오래 즐길 수 있으니 어찌 좋지 아니한가. 우크라이나 출신의 V는 중국 상해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다가 여행도 할 겸 비자 갱신을 위해 태국으로 온 20대 초반의 여성이다. 큰 키와 늘씬한 몸매, 하얀 피부와 정확한 이목구비 등 ‘러시아 미인’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외모다. 그녀는 항상 긴 머리를 쓸고 고개를 살짝 꺾고 입을 삐쭉 내밀며 셀카 찍기에 바쁜데, 무슨 셀카를 그리 많이 찍냐고 놀리면 이렇게 답한다. 내 인스타그램 팔로워들을 위해서지! 그들을 실망시킬 순 없잖아! V는 매일 친구 집에서 노닥거린다. 말 그대로 ‘노닥’거리는데, 휴대폰을 보고, 담배나 마리화나를 피우고, 가끔 우크라이나 전통 요리를 하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남자가 R이다. 브라질 출신의 건장한 청년 R은 SNS 마케팅 강의로 돈을 벌며 세계 여행 중이었는데, 그만 가라오케 바에서 노래를 부르던 V에게 홀딱 반해 버렸다. 한참 밀당을 벌이던 그들은 마침내 커플이 되었고, 이제 노닥거리는 사람은 하나가 아닌 둘이다. 둘은 어디서든 애정 행각을 벌인다. 카밀은 저리 가라 놀리지만 난 그저 풋풋한 젊은이들의 연애가 귀엽기만 하다. 세상이 미치든 말든 코로나 때문에 클럽이 문 닫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이 둘의 단순함이 한심할 때도 있지만, 세상사 신경 쓰지 않는 대담함이 부럽기도 하다. 케쎄라쎄라, 어차피 미친 세상, 더 미친들 어떠하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입이 닳도록, 순수하고 무력하며 공허한 키스. 난 중얼거린다. 아무 생각 없는 니들이 부럽다. 마스크만이라도 잘 써주렴.
2020년 3월 17일 태국 끄라비의 한구석. 같은 판데믹이라도 상황이 다른 3개의 판데믹이 있다. 우리 가족과 친구까지 더하면 5개다. 누구는 돌아가려고 하고 누구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고 누구는 돌아가든 말든 될 대로 되라고 누구는 돌아갈 곳이 없고 누구는 남아있지만 암담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얼마나 이해할까. 아니, 이해 자체가 가능할까? 난 친구 집 담장 너머, 끄라비 너머, 태국 너머, 전 세계 70억 인구의 70억 개 판데믹을 상상한다. 누구는 절규하고 누구는 절망하고 누구는 절박하고 누구는 부정하고 누구는 비웃고 누구는 무심하며 누구는 뜻밖의 이익을 보겠지. 그리고 결코 서로의 상황을 100 퍼센트 이해할 수 없겠지. 머릿속 꽉 찬 상상에 질려 난 부르르 몸을 떤다.
작렬하던 해는 슬슬 고개를 숙이고 퇴근 준비를 한다. 술렁이는 집안 분위기에 지치는지 친구는 노을을 보러 해변에 가겠다며 오토바이 엔진을 켠다. M과 A도 그 뒤를 따른다. D는 어디로 갔는지 없고 V와 R은… 말해 무엇하리. 미루가 자기도 가겠다며 내 바짓가랑이를 잡는다. 오토바이를 타려면 카밀이 필요한데 그는 가기 싫다며 소파 속으로 파고든다. 부다다당~ 엔진 소리를 내며 두 대의 오토바이가 먼저 출발한다. 주인이 가거나 말거나 내 옆에서 갸르랑거리던 땅딸보 페르시안 고양이 벨라가 쩌억 하품을 한다. 알라아아어아~ 멀리 이슬람교 사원에서 기도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린다. 벌써 5시구나. 하늘이 울긋불긋하다. 난 눈을 감고 기도 소리를 음미하며 코로 큰 숨을 들이켠다. 여기는 환상특급일까? 다시 숨을 내뱉으며 잠시 판데믹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