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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Apr 05. 2021

판데믹을 대하는 3가지 자세

'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어디 보자… 그날이 언제더라코로나 시대에는 다 그날이 그날 같아서 한참을 되짚어야 한다때는 바야흐로 2020 3 17태국의 끄라비우리가 머물던 친구의 집에는 다른 여행자들도 있었는데가볍게 지나갈 줄 알았던 코로나가 심각해지자 다들 초조해졌다다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돌아간다면 어떻게그냥 버틸까사정없이 내리쬐는 태국의 노란 햇빛과 후덥지근한 습기가 숨을 조이던 그날긴장감 돌던 친구 집의 공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상황 1.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쓴 폴란드 출신 M이 손톱을 깨물며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작지만 단단한 몸의 그는 항상 팔 굽혀 펴기플랭크 등 시범을 보이는 뻐기기 대장이다. ‘형사 콜롬보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악센트가 잔뜩 들어간 영어를 말하는 모습이 무척 귀엽다안절부절못하는 그와 달리 여자 친구 A는 옆에서 휴대폰만 보고 있다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항상 조용히 미소만 지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M이 이렇게 초조한 이유는 비행기 때문이다그는 나머지 휴가 일정을 취소하고 걸 수 있는 모든 항공사에 전화해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찾고 있다란드가 국경을 봉쇄해서 집으로 갈 길이 막혔지만 최소 유럽 땅 어디라도 밟아보자는 심산이다간신히 카타르 항공사의 마지막 베를린행 비행기를 찾아낸 M은 상담사와 연결 중이니 잠시만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을 휴대폰 너머로 근 한 시간째 듣는 중이다불안에 영혼이 잠식된 표정의 그와 달리 될 대로 돼라 SNS만 보는 표정이 사뭇 대조적이다

  - 굿 애프터눈카타르 에어라인

  사람 목소리다제풀에 꺾여 끊게 만드는 게 안내 방송의 목표인 줄 알았는데진짜로 사람이 받는구나. M은 온몸을 던져 빛의 속도로 전화기를 낚아챈다기필코 이 비행기를 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동작이다원래 빠른 그의 말이 더 빨라지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더 가늘어진다통화가 진행될수록 굽은 그의 어깨가 펴진다미간의 일자 주름도 펴지고 마침내 함박웃음이 얼굴을 덮는다하늘이 감복했구나. M이 휴대폰이 부서져라 외친다땡큐땡큐땡큐그리고 마치 록키처럼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는다할렐루야나무아미타불인샬라

  후에 이들은 끄라비에서 푸켓으로푸켓에서 방콕으로방콕에서 베를린으로베를린에서 폴란드로 가는 긴 여정을 마치고 집에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냈다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승리의 브이를 그리며 활짝 웃는 사진이었다드디어 집에 간다는 안도감이 얼굴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상황 2

  같은 시각집 밖의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은 D를 본다인도네시아에서 온 라디오 PD이자 싱글 맘인 그녀는 흥분한 M의 목소리가 거슬린다는 듯 담배만 뻑뻑 피우고 있다너무 바쁜 생활에 번아웃이 되어 직장에 직서를 낸 후 13살 된 아들을 엄마에게 맡기고 생애 처음 혼자 해외여행을 떠난 그녀다그 첫 도착지가 끄라비였는데하필 시작과 동시에 코로나가 터지다니어디에도 갈 수 없게 된 이 상황이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서핑으로 그을린 그녀의 매끈한 갈색 손가락 사이로 담배꽁초가 차곡차곡 쌓인다그녀의 휴대폰이 울린다엄마로부터 온 국제 전화다분명 그녀의 엄마는 이 시국에 여행이라니 미쳤냐빨리 돌아와라타박했을 거다하지만 D는 고개를 젓는다어떻게 떠난 여행인데떠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이대로 멈출 수 없다고 한다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격앙되는 목소리로 어떤 분위기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논쟁은 계속되고그녀는 지쳐가고그럴수록 담배는 산이 된다

  이틀 후 그녀는 같이 있자는 우리의 권유를 뿌리치고 북쪽으로 떠났다히치하이킹을 한다고 했다그렇게 어찌어찌 방콕까지 갔으나 그만 방콕이 전면 록다운이 되는 바람에 그대로 그곳에 갇혀버렸다밖에도 못 나가는 방콕의 숙소에 갇히는 것보다는 최소 바닷가에는 갈 수 있는 끄라비에 갇히는 게 더 나았을까아무도 모를 일이다.  

 

  상황 3

  반면 V와 R은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기에 바쁘다될 대로 돼라끄라비의 아름다움을 더 오래 즐길 수 있으니 어찌 좋지 아니한가우크라이나 출신의 V는 중국 상해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다가 여행도 할 겸 비자 갱신을 위해 태국으로 온 20대 초반의 여성이다큰 키와 늘씬한 몸매하얀 피부와 정확한 이목구비 등 ‘러시아 미인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외모다그녀는 항상 긴 머리를 쓸고 고개를 살짝 꺾고 입을 삐쭉 내밀며 셀카 찍기에 바쁜데무슨 셀카를 그리 많이 찍냐고 놀리면 이렇게 답한다내 인스타그램 팔로워들을 위해서지그들을 실망시킬 순 없잖아! V는 매일 친구 집에서 노닥거린다말 그대로 ‘노닥거리는데휴대폰을 보고담배나 마리화나를 피우고가끔 우크라이나 전통 요리를 하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남자가 R이다브라질 출신의 건장한 청년 R은 SNS 마케팅 강의로 돈을 벌며 세계 여행 중이었는데그만 가라오케 바에서 노래를 부르던 V에게 홀딱 반해 버렸다한참 밀당을 벌이던 그들은 마침내 커플이 되었고이제 노닥거리는 사람은 하나가 아닌 둘이다둘은 어디서든 애정 행각을 벌인다카밀은 저리 가라 놀리지만 난 그저 풋풋한 젊은이들의 연애가 귀엽기만 하다세상이 미치든 말든 코로나 때문에 클럽이 문 닫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이 둘의 단순함이 한심할 때도 있지만세상사 신경 쓰지 않는 대담함이 부럽기도 하다케쎄라쎄라어차피 미친 세상더 미친들 어떠하리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을입이 닳도록순수하고 무력하며 공허한 키스난 중얼거린다아무 생각 없는 니들이 부럽다마스크만이라도 잘 써주렴.


끄라비 전경

  2020 3 17일 태국 끄라비의 한구석같은 판데믹이라도 상황이 다른 3개의 판데믹이 있다우리 가족과 친구까지 더하면 5개다누구는 돌아가려고 하고 누구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고 누구는 돌아가든 말든 될 대로 되라고 누구는 돌아갈 곳이 없고 누구는 남아있지만 암담하다지금 이 순간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얼마나 이해할까아니이해 자체가 가능할까난 친구 집 담장 너머끄라비 너머태국 너머전 세계 70억 인구의 70억 개 판데믹을 상상한다누구는 절규하고 누구는 절망하고 누구는 절박하고 누구는 부정하고 누구는 비웃고 누구는 무심하며 누구는 뜻밖의 이익을 보겠지그리고 결코 서로의 상황을 100 퍼센트 이해할 수 없겠지머릿속 꽉 찬 상상에 질려 난 부르르 몸을 떤다

 

  작렬하던 해는 슬슬 고개를 숙이고 퇴근 준비를 한다술렁이는 집안 분위기에 지치는지 친구는 노을을 보러 해변에 가겠다며 오토바이 엔진을 켠다. M과 A도 그 뒤를 따른다. D는 어디로 갔는지 없고 V와 R… 말해 무엇하리미루가 자기도 가겠다며 내 바짓가랑이를 잡는다오토바이를 타려면 카밀이 필요한데 그는 가기 싫다며 소파 속으로 파고든다부다다당엔진 소리를 내며 두 대의 오토바이가 먼저 출발한다주인이 가거나 말거나 내 옆에서 갸르랑거리던 땅딸보 페르시안 고양이 벨라가 쩌억 하품을 한다알라아아어아멀리 이슬람교 사원에서 기도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린다벌써 5시구나하늘이 울긋불긋하다난 눈을 감고 기도 소리를 음미하며 코로 큰 숨을 들이켠다여기는 환상특급일까다시 숨을 내뱉으며 잠시 판데믹을 잊는다.


끄라비의 기암 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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