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께 쓰는 편지 #5
엄마.
예전엔 점 보러 자주 가셨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안 가세요? 전 여전히 제 인생이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해서 점 보고 싶을 때가 많은데, 엄마는 그런 건 다 부질없다고 하시려나요? 엄마는 제가 이렇게 살 거라고 상상하셨어요? 이른바 ‘수순대로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 전, 해마다 새로운 제가 태어나는 것 같아요. 작년의 저와 재작년의 저, 또 그전의 저는 처한 환경이나 생각이 너무 달라서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거리가 느껴져요. 매해 다른 사주를 가진 사람처럼 과거의 전 모두 이방인이에요.
망원동에서 살던 어느 날, 오랫동안 소원했던 지인이 바람처럼 나타나서 제 사주를 봐줬어요. 못 본 사이 대금을 배웠고 명리학을 공부했다고 했어요. 문득 제가 생각나서 연락했다고 하더라고요.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해서 점이나 볼까 했는데 이렇게 짜잔 나타나 제 생년월일을 묻다니, 인생 참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더불어 직접 들고 온 대금으로 산조 한 곡 멋들어지게 뽑아주시니, 엄마, 이거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에요. 운세 봐주고 서비스로 대금 산조 한 곡. 복채로 7만 원?
제가 점 보는 걸 좋아한다고 하면 친구들은 의외라고 해요.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 외치는 사람처럼 보인다면서요. 하지만 복채가 비싸서 못 볼 뿐이지, 생각이 많거나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용한 무속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귀가 펄럭거려요. 정통 명리학도 봤고 성명학도 봤고 신점도 봤고 타로도 봤어요. 누군가 '당신은 이렇소!'라고 얘기할 때, 원래 알고 있는 제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재밌고 그런가? 라고 의문을 가지는 것도 재밌어요. 명리학은 엄밀히 따지면 통계학인데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용하다 아니다로 갈리는 것도 재밌고요. 타인에 의해 분석되는 전 꼭 남 같아요. 그 간격이 주는 짜릿함도 재밌어요. 사실 미래에 대해 무슨 답을 얻기보단, 이것도 이른바 상담과 같아서 주고받는 말속에 조언이 될만한 건 취하고 스스로 답을 찾기도 하는 거예요.
- 고집이 무지 세네요.
지인은 이미 알고 있는 제 모습 하나를 확인시켰어요.
- 저 꼰대예요.
- 슈퍼 꼰대네, 슈퍼 꼰대.
- 그게 다 사주에 보여요?
- 다 보여요.
흠... 꼰대인 건 인정하겠지만 슈퍼 꼰대일 것까지야...
문득 신점 본 게 생각나요. 한국 생활 2년 차가 넘어갈 때, 한국을 떠나느냐 마느냐로 카밀과 크게 실랑이를 벌인 후 결론을 못 내려 너무 답답해서 찾은 신점이었어요. 갓 신내림을 받아서 이른바 '신빨'이 좋다고 했어요. 의정부역 근처에 있는 신당이었는데, 이날 만난 무속인은 투 블록 머리 스타일에 방송인 조세호를 똑 닮은, 20대 중반의 청년이었어요. 전화로 예약을 잡았을 땐 여성과 통화를 했었어서 놀랐고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손님을 맞는 평범한 모습과 상담을 위해 의복을 갈아입고 나온 모습의 차이가 꽤 커서 또 한 번 놀랐어요.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저에 대한 팩트 몇 개를 마치 히로시마 원폭 투하하듯 팍팍 내뱉었어요. 저는 입도 뻥끗 안 했는데 말이에요.
- 외국인하고 결혼하셨어요?
- 아, 예. (솔직히 제가 한국 남자에게 인기 있을 스타일은 아니죠)
- 뭐... 전시회 같은 거 하고 방송에 나온 적 있어요?
- 예. 맞아요. (제가 예술 좀 하게 생겼죠)
- 그런데 남편이... 영어권은 아니네요.
- 예. (앗, 이건 어떻게 알았을까요?)
- 아이는 몇 살?
- 6살이요.
- 아이가 꽤 어릴 때부터 돌아다녔네요.
- 예... (오! 이건 정말 어떻게 알았을까요??!!)
- 오케이… 자! 이제 궁금한 거 물어보세요.
조세호 청년은 저에 대한 썰을 푸는 대신 바로 질문으로 들어갔어요. 자기는 사주팔자니 그런 건 잘 모르고 그저 모시는 신이 옆에서 해주는 말을 옮기는 것뿐이라고 했어요. 앞의 말들은 '내가 이만큼 잘 맞추니 걱정 말고 질문해라!'란 선전포고와 같은 거였죠. 전 수첩에 적어온 질문들을 꺼내 물었고 그는 하나하나 답했어요. 지금 보면 맞은 것도 있고 안 맞은 것도 있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미루와 제가 같이 손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고 한 거였어요. 즉 미루와 전 서로를 돕는 상생의 관계이니 뭐든 같이 하라고요. 그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져서 전 속으로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 건졌으니 됐어! 이 재미에 점 보는 거지!’ 쾌재를 불렀어요. ‘미루와 상생의 관계’라는 말은 지금도 종종 마음에 새겨요. 엄마로서 마음가짐을 다져주는 말이랄까요. 청년은 석 달 후 다시 오라고 했지만 전 가지 않았어요.
- 희한한 사주네요.
다시 망원동으로 돌아와서, 지인은 명리학책을 뒤적이며 계속 제 사주가 희한하다고 했어요. 그동안 돌아다닌 걸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에요. ‘희한한 사주’라는 말에 괜히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으쓱했지만, 곧 그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 헷갈렸어요. 좋으면 좋고 아니면 아닌 거지 희한한 건 또 뭐에요? 결국 전 이렇게 말했어요.
- 저기요, 그냥 생긴 대로 살래요.
복채는 못 줬지만 대신 밥을 샀어요. 그는 공부를 더 한 후 다시 봐주겠다고 했어요. 그땐 해석이 다를 수도 있다면서요. 지금 누군가 제 사주를 봐준다면 꽤 재밌을 것 같아요. 의정부의 조세호 청년도, 제 지인도, 그동안 만났던 무수한 무속인들도, 현재 상황을 점쳤을까요? 판데믹이 터져서 여행이 중단되고 네덜란드에서 지내게 될 걸 알았을까요? 모르죠, 신들이 수차례 경고하고 책의 몇 장 몇 페이지에 떡하니 있음에도 인간의 무관심과 오만이 알아채지 못했거나 무시했을 수도요.
이젠 ‘생긴 대로 살래요’라고 쉽게 말할 수가 없어요. 변수, 변이가 너무 많아요. 콩 심는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나는 이런 자연스러운 인과관계가 어려운 세상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게 가능한지, 아니,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에요. 어차피 컨트롤이 안 되는 운명, 그냥 될 대로 되라지! 이렇게요. 점점 점 보는 게 재미가 없네요.
엄마. 50년을 살아온 만큼 50명의 제가 전혀 알아보지 못할 다양한 이방인의 모습으로 지난 타임라인에 쭉 정렬해 있어요. 그 50명을 모두 토닥이고 싶네요. 내년이면 또 달라지겠죠? 그땐 이 편지를 쓰는 제가 타임라인에 서 있을 거예요.
전 오늘도 심심풀이로 사주 앱을 열어 ‘오늘의 운세’를 봐요. 지금이라도 지인에게 연락해서 물어볼까요? 정 안 되면 대금이라도 연주해달라고 해야겠어요. 고단한 해외 생활에 위로라도 받게요.
엄마, 저 잘살고 있는 거죠? 엄마 딸 잘 살 거예요. 전 제 사주가 좋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엄마 딸, 승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