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께 쓰는 편지 #6
엄마.
엄마는 평소 카밀과 대화할 때 어떠셨어요? 엄마야 뭐 항상 ‘아이고, 우리 착한 사위~’하며 예뻐하시지만 그래도 그의 한국어가 서투르니 한계가 있잖아요. 아시다시피 카밀은 사람 만나고 대화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의외로 그는 한국에서 지낼 때 한국 사람 만나는 걸 힘들어했어요. 한국인 특유의 ‘빈말’과 ‘떠보기’ 때문에요. 원래 네덜란드 사람들이 필터 없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걸로 유명하거든요. 돌려 말하는 법이 없고 뱉은 말은 뱉은 말 그대로를 뜻하죠. 만약 ‘직설 화법’ 랩 배틀이 있다면 우승은 반드시 네덜란드인이 할 거예요. 그래서 문장 하나에 수많은 함의가 있는 한국인의 화법은 카밀이 넘어야 할 큰 산이었어요. 우리는 누가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했을 때 ‘응, 그러자!’라고 답하지만, 바로 알아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요. 사실 그 말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먹는 행위를 챙김으로써 내가 당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리려는 호감의 태도에요. ‘연락할게요’, ‘다음에 또 뵈어요.’, ‘술 한잔해요.’ 등등, 우리는 일상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관계 개선을 위해, 이런 빈말을 수없이 해요. ‘떠보기’는 또 어떻고요? 상대에게 조금은 예민할 수 있는 질문을 무안하지 않게, 배려의 차원에서 돌려서 하잖아요. 하지만 카밀에게 이런 화법은 암호 해독과 같아서, 밥 먹자고 하면 말 그대로 먹어야 하는 그에게 종종 빈말은 거짓말로, 떠보기는 무책임함으로 해석되었어요.
그래서인지 카밀이 관계를 오래 지속한 한국인은 없어요. 종종 ‘카밀은 제가 만난 외국인 중 제일 착한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들었지만 언어 교환에서도, 사교 모임에서도, 상대는 항상 바빴고 만남은 지속되지 않았죠.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저 언어 장벽이거나 카밀의 투 머치 토크가 부담스러웠나, 짐작만 할 뿐이에요. 카밀은 이렇게 투덜댔어요.
- 만나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지 왜 바쁘다고만 해?
- 싫다는 말을 어떻게 면전에 헤? 그리고 진짜로 바쁠 수도 있지.
- 뱅뱅 돌려 말하는 것보단 시간 절약하고 좋지. 흐지부지 어물쩍 넘어가는 거 별로야.
- 그래도 니들처럼 말하면 (네덜란드인처럼 직설적으로 말하면) 상처받잖아.
- 연락하겠다고 하고 안 하는 게 더 상처야.
그런데 신기해요. 네덜란드에 있는 지금도 그 경험은 계속돼요. 오겠다던 사람은 오질 않고, 연락하겠다던 사람은 연락하지 않고, 우리의 작품을 사겠다던 사람은 사지 않아요. 우연의 일치로 모두 한국인이에요. 며칠 전에는 한참 그림을 그리는 제 옆에서 카밀이 자신의 휴대폰을 보다가 또 투덜거렸어요. SNS에 올린 친구의 포스팅을 보고 난 후였어요.
- 이 녀석은 내 책 산다고 했으면서 당최 연락이 없어.
- 또 그 얘기야? 그냥 지나가는 말일 수도 있잖아. 사고 싶으면 사겠지.
- 그럼 말을 안 하면 되지 운은 왜 띄우고 그래?
- 뭐… 분위기상 그랬을 수도 있고… 너 기분 좋게 해주고 싶었나 보지.
- 그러려면 진짜로 책을 사야지! 내 글이 마음에 안 들면 솔직히 말하면 될 것을. 이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여기서 살았으면서도 이러네. 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야! (카밀의 친구는 어렸을 때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입양되었어요. 그리고 책은 독립출판이어서 개인적으로 연락해야 살 수 있고요)
- 잉?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해? 거기서 한국인이 왜 나와?
- 뱉었으면 지켜야지. 하여간 한국인은…
솔직히 카밀에게 필요한 건 공감이었을 테니 군말 없이 받아줬으면 조용히 끝났을 거예요. 하지만 말끝을 흐리며 ‘하여간 한국인은…’이란 일반화에 이른 대화가 좋은 방향으로 갈리는 만무했어요.
- 한국인이 뭐? 왜 말을 흐려?
- 그렇잖아!
- 그렇긴 뭐가 그래? 말 하나에 목숨 거는 네가 너무 순진하단 생각은 안 드니?
- 아니, 지키지 못 할 말을 왜 하냐고! 난 한국 사람 빈말하는 거 정말 이해 안 가.
여기서 제가 한국의 빈말 문화를 EBS 다큐멘터리처럼 차근차근 설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전 그렇게 우아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수십 번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지겨웠어요. 전 치사하게 옛날 일을 들먹이며 ‘그러는 넌?’하고 덤비는 찌질이처럼 말했어요.
– 그래, 네 똥 굵다. 그러는 니들 더치(네덜란드인)는 어떻고?
- 더치가 뭐?
-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하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더치보다야 기분 좋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한국인이 훨씬 낫지, 안 그래? 니들은 무례하잖아. 솔직함? 웃기라 그래. 말이 좋아 솔직함이지, 그건 솔직함으로 포장한 무례야. 네 친구가 내 작은 키 가지고 뭐라 했던 거 기억하지? 말 한마디를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어쩜 그리 남 생각 안 하고 지 꼴리는 대로 말하냐? 그거 진짜 이기적인 거야. 어쩔 땐 다정한 빈말이 더 좋은 법이라고. 배려 좀 해, 배려 좀! 난 네덜란드 직설 화법 정말 이해 안 가!
무슨 말이 나올까 받아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전 마치 필라델피아 박물관 계단 꼭대기에서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록키처럼 승리감에 쩔었지만 이내 기분이 싸해지고 풀이 죽었어요. 너무 유치해서요. 다 알면서, 문화의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이 없다는 걸 알면서 뭘 이렇게까지 일반화하며 생채기를 내는지.... 침묵은 흐르고 우린 부끄러움과 멋쩍음에 입맛만 다시며 서로의 눈을 피했어요. 전 작은 목소리로 슬쩍 말했어요.
- 정 그러면 제대로 물어봐. 사긴 살 거냐고. 뒤에서 궁시렁거리지 말고.
- 싫어. 내가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 쩝, 배고프다. 저녁 뭐 먹을까?
전 서둘러 부엌으로 갔어요.
엄마, 엄마도 아빠 화법 때문에 언성 높이신 적 많죠? 엄마는 다정하게 설명을 잘하시지만 아빠는 성격이 급해서 앞뒤 맥락 없이 말씀하시잖아요.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함으로 ‘치아라 마!’ 내뱉으며 대화를 종료하던 아빠를 기억해요.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상대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 화법이 다른데, 다른 언어, 다른 문화를 토대로 한 대화는 어떻겠어요. 전 냄비 속 브로콜리 수프를 저으며 아마 우린 평생 서로의 언어문화를 이해 못 하고 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이해하더라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거라고요. 카밀에게 한국인은 못 믿을 사람으로, 제게 네덜란드인은 예의 없는 사람으로 남겠죠. 계속 서로의 문화를 불평하고, 동시에 변호하며 국뽕에 차올라 자랑스러워하며 살겠죠. 갑자기 제게 등을 돌리고 있는 카밀이 한없이 먼 이방인으로 느껴졌어요. 전 과연 그의 말을 백 퍼센트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제가 이 나라에서 애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밀이 한국에서 관계를 지속한 한국인이 없었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미리 체념이 되었어요. 문득 카밀과 제가 한국어도 네덜란드어도 아닌 영어로 소통해서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제2 외국어가 만드는 간격은 더 좁을지도 모르니까요.
천만다행으로 우리의 입은 말하기가 아닌 먹기용으로도 쓸 수 있어요. 화법이란 우리 사이의 얇은 벽 너머에 있는 그를 불렀어요. 따끈한 브로콜리 수프가 완성되었으니 빨리 밥 먹자고요. ‘밥 한번 먹자’란 빈말이 아니고 진짜로 밥 먹자고요. 화법이고 뭐고, 우선 배부터 채우자고요.
엄마, 사위가 외국인 사위여서 답답하시죠? 방송에 나오는 외국인처럼 한국말을 잘하면 좋았을 텐데... 전에 제가 네덜란드인 며느리였다면 시부모님께서 어떻게 느끼셨을지 궁금하다고 썼던 기억이 나네요. 거기에도 썼듯, 네덜란드인 사위를 맞으신 엄마 팔자도 보통은 아닌 걸로!
엄마 딸, 승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