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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Jan 16. 2021

내 눈이 머무는 자리

'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2년 반 전 살았던 서울의 망원동엔 주택이 별로 없었고 빌라와 아파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밖에 널린 빨래도 보기 어려웠고 문도 심심한 직사각형 회색 문만 가득했다. 이런 상황일 때 난 무엇에 눈길을 줘야 할까? 무엇을 내 취향 속에 넣을 수 있을까? 난 망원동을 비롯한 서교동, 성산동, 합정동 일대에서 자랐다. 이 일대는 모두 내 구역이나 다름 아니었다. 내가 눈길을 줄 수 있었던 건 바로 내 어린 시절의 노스탤지어였다. 별난 장난감이 주렁주렁 전시된 학교 앞 문방구, 여전히 버티고 있는 구멍가게, 철물점, 세탁소, 철학관 등등… 마침 집 앞에 오래된 동네 목욕탕이 있었다. 굵은 고딕 폰트로 ‘목욕탕’이란 글자가 자랑스럽게 새겨진 길쭉한 빨간 벽돌 굴뚝에 내 눈을 두었다.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갔던 합정동의 작은 목욕탕을 떠올리며. 

 

  어딜 가든 내 취향의 풍경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된다. 내가 사는 곳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고, 그럼으로써 정을 붙이고 내 위치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지금 사는 네덜란드에서 내가 찾은 풍경은 배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25퍼센트가 해수면보다 낮은 탓에 어디서든 운하를 볼 수 있는데, 그 운하를 따라 쭉 정착된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배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뱃머리에 쓰인 이름을 보며 그 이름의 유래를 상상하고, 배의 크기와 스타일을 보며 배 주인의 주머니 사정과 취향도 상상한다. 배에서 살아보는 상상도 하고 항해하는 모습도 상상한다. 

  내 마음 한구석, 차곡차곡 쌓여 가는 이 풍경들은 마치 한겨울을 든든히 지낼 땔감이 잔뜩 쌓인 창고와 같다. 이들 때문에 내 일상이 풍요롭고 내 여행이 풍요롭고 자칫 고단할 수 있는 해외 생활을 잘 버틸 수 있다.  

  여행하다 보면 마법처럼 내 눈이 머물고, 내 귀가 펄럭이고, 내 전신이 레이다를 발산하는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건 하나의 카테고리가 되고 시나브로 내 취향이 된다. 취향의 수집은 유용하다. 내가 누군지 헷갈릴 때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란 단서를 제공한다. 그게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나를 이루는 일부를 확인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몇 가지 풍경들이 있다. 이발소, 기차역, 빨래, 문과 창문 등등. 이 풍경들을 볼 때마다 난 그 모습을 담지 못해 안달이었다. 뉴욕 브루클린의 흑인 아저씨들이 이발소에 모여 턱에 하얀 거품을 잔뜩 묻힌 채 농담 따먹는 풍경이 좋았고, 천막 아래 레게머리 포스터가 어설프게 달린 간이 플라스틱 의자와 긴 손톱으로 날 콕 집으며 머리 좀 하고 가라는 언니의 케냐 시골 장터 미장원 풍경이 좋았다. 뉴욕 그랜드 센트럴 기차역의 천정을 가득 메운 별자리 장식이 좋았고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며 모두가 바닥에 누워 자는 인도 콜카타의 기차역 풍경이 좋았다. 내게 ‘풍경’이라는 단어는 시궁창 같은 곳에도 낭만을 부여하고 앞뒤 문맥과 전후 사정 상관없이 오직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진 단어다. 

 

  빨래 얘기를 해보자. 황토색 건물이 전부였던 네팔 카트만두(Kathmandu)의 거리에 화룡점정 같은 활력을 넣어주었던 빨래, 두 사람조차 나란히 걷는 걸 허락하지 않는 이탈리아 옛 도시의 좁은 골목 사이를 보란 듯이 삼삼오오 가로질러 걸려있던 빨래, 비가 와도 젖든 말든 굳건히 자리를 지켰던 리스본의 빨래, 알록달록 혹은 거무죽죽, 그 색깔만으로도 집주인의 취향과 경제 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펄럭이는 정도에 따라 바람의 세기와 방향, 그리고 계절을 온전히 느끼게 해 준 전 세계의 모든 빨래. 난 널린 빨래를 보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빨래는 단어 그 자체에서 행위의 전 과정을 느낄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쌍디귿이 주는 거칢과 바로 리을로 이어지는 부드러움. 그건 노동의 성질과도 같아서 일하는 동안의 피곤함과 끝낸 후의 상쾌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이건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끝나지 않는 엄마의 가사노동을 상기시킨다. 좁은 골목 여기저기 전시된 노동의 강도는 고개를 뒤로 빼고 팔을 앞으로 쭉 뻗어 있는 힘껏 수분을 탈탈 터는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자연스레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과연 빨래에서 해방되는 날이 올까? 빨래를 보다가 뜬금없이 가사 해방을 외치는 건 괜한 날씨 탓일까? 빨래의 색깔만큼 형형색색 다양한 색을 가진 엄마들에게 경배를!

 

  자, 이번엔 문 얘기를 해보자. 리스본의 구시가지에 있는 아파트의 문들은 똑같이 생긴 게 하나도 없다. 길을 걷다 장인의 손길이 잔뜩 들어간 잘 빠진 커브의 손잡이를 가진 문이나 간달프가 몸을 숙이고 들어간 호빗 집의 문처럼 왜 저렇게 작게 만들었을까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문을 볼 때, 난 가던 길을 멈추고 혹시나 그 문이 열릴까 잠시 기다린다. 과연 어떤 사람이, 어떤 복장을 하고 어떤 포즈로 나올까? 십중팔구 오랫동안 이 동네를 지킨 터줏대감 어르신일 테지만 그래도 의외의 인물이 나온다면 참 재미있을 거다. 이런저런 기대감에 부풀어 가만히 문을 지켜본다. 5초, 10초, 20초…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문은 아무런 미동 없이 굳게 입을 다물 뿐이다. 그 옆의 창문을 본다. ‘저 커튼 뒤로 오랫동안 세상과 차단되어 빛을 보지 못한 어떤 생명체가 살고 있을지도 몰라.’ 드라마를 봐도 너무 많이 본 결과로, 마치 유럽의 옛 잔혹 동화에나 나올 듯한 스토리를 혼자 만들며 혹여 누군가 커튼 사이로 빼꼼히 밖을 쳐다보지 않을까 또 기다린다. 다시 5초, 10초, 20초. 역시 사람의 인기척은 보이지 않는다. 문득 이런 날 참 팔자 좋구나란 생각에 피식 웃으며 난 다시 갈 길을 간다. 

 

  창문에 대한 경험이라면, 카밀과 한겨울에 했던 시베리아 기차 횡단을 꼽을 수 있다. 러시아의 서쪽 모스크바에서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멈추지 않고 달리면 열흘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 기간을 기차 안에서만 버틸 자신이 없어서 에카테린부르크(Yekaterinburg), 이르쿠츠크(Irkutsk), 하바로브스크(Khabarobsk) 등 세 개의 도시에서 쉬었다. (바이칼 호수로 유명한 이르쿠츠크의 온도는 영하 28도였다. 너무 추워서 숨을 쉬거나 눈을 껌뻑일 때마다 코털과 속눈썹에 성에가 꼈다) 그때 기차는 말 그대로 눈보라를 헤치고 시베리아를 가르는 설국열차였다.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시베리아 숲이 창밖으로 끝없이 이어졌는데, 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창틀에 턱을 괸 채 이를 구경했다. 은색 나무 사이로 아이보리색 갈기와 투명한 크리스털 뿔을 자랑하며 다리를 치켜들고 튀어나올 새하얀 유니콘을 상상했다. 얼음 마차를 타고 질주하는 눈의 여왕도 상상했다. 그 상상만으로도 하루가 휙 갔다. 창문은 티브이 같았고 창밖의 풍경은 라이브 다큐멘터리였다. 창문 안의 따뜻함과 창문 밖의 차가움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그때 느꼈다. 세상과의 통로와 단절은 동시에 존재한다는 걸. 그 사이에서 난 이도 저도 아닌 사람 같았다. 




  2년 반 전 살았던 서울의 망원동엔 주택이 별로 없었고 빌라와 아파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밖에 널린 빨래도 보기 어려웠고 문도 심심한 직사각형 회색 문만 가득했다. 이런 상황일 때 난 무엇에 눈길을 줘야 할까? 무엇을 내 취향 속에 넣을 수 있을까? 난 망원동을 비롯한 서교동, 성산동, 합정동 일대에서 자랐다. 이 일대는 모두 내 구역이나 다름 아니었다. 내가 눈길을 줄 수 있었던 건 바로 내 어린 시절의 노스탤지어였다. 별난 장난감이 주렁주렁 전시된 학교 앞 문방구, 여전히 버티고 있는 구멍가게, 철물점, 세탁소, 철학관 등등… 마침 집 앞에 오래된 동네 목욕탕이 있었다. 굵은 고딕 폰트로 ‘목욕탕’이란 글자가 자랑스럽게 새겨진 길쭉한 빨간 벽돌 굴뚝에 내 눈을 두었다.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갔던 합정동의 작은 목욕탕을 떠올리며. 

 

  어딜 가든 내 취향의 풍경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된다. 내가 사는 곳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고, 정 붙이고 내 위치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지금 사는 네덜란드에서 내가 찾은 풍경은 배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25퍼센트가 해수면보다 낮은 탓에 어디서든 운하를 볼 수 있는데, 그 운하를 따라 쭉 정착된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배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뱃머리에 쓰인 이름을 보며 그 이름의 유래를 상상하고, 배의 크기와 스타일을 보며 배 주인의 주머니 사정과 취향도 상상한다. 배에서 살아보는 상상도 하고 항해하는 모습도 상상한다. 

  내 마음 한구석, 차곡차곡 쌓여 가는 이 풍경들은 마치 한겨울을 든든히 지낼 땔감이 잔뜩 쌓인 창고와 같다. 이들 때문에 내 일상이 풍요롭고 내 여행이 풍요롭고 자칫 고단할 수 있는 해외 생활을 잘 버틸 수 있다.  


Drawing by Yellow Duck

그라싸, 리스본, 포르투갈

그림 by 옐로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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