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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Dec 29. 2018

리스본의 노점 상인

'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2015년 겨울의 어느 날. 흐리고 눅눅했지만 툭툭(Tuktuk, 3륜 구동 택시)를 그리고 싶다는 욕망에 카밀에게 미루를 맡기고 혼자 리스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툭툭 사진을 찍고 있었다. 리스본 제1의 관광 명소인 리스본 성당 (Se de Lisboa) 앞에서 줄줄이 손님을 기다리는 빨강 파랑 알록달록한 툭툭을 찍은 후 살짝 피곤하여 벤치에 앉아 쉬려는데 문득 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관광객에게 호객하는 거리의 노점 상인. 관광지에 소매치기 없으면 마늘 없는 삼겹살이요, 노점상 없으면 소주 없는 빈대떡인 법. 벤치에 앉은 노부부를 붙잡고 장신구를 파는 젊은 흑인 청년의 모습은 관광지에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갈 법도 했지만 앉고 싶던 벤치에 못 앉자 괜히 짜증이 났고, 대체 뭘 팔기에 저러나 싶어 옆 풍경을 그리는 척하면서 어깨너머로 들리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 잇츠 그뤠잇, 잇츠 그뤠잇! 프롬 아프리카! 칲, 칲! 어포다블!

  - 리얼리? 리얼리 프롬 아프리카? 렛 미 씨.

  출신 지역을 바로 알려주는 악센트 짙은 영어와 과장된 몸짓, 격앙된 톤과 말투. 노부부는 분명 리스본에 처음 왔을 것이고, 청년은 분명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이민자일 것이고, 장신구는 분명 아프리카 직수입이 아닐 것이다. 여행하며 워낙 많은 호객 행위를 당해서 가판대를 들고 누군가 다가오면 바로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장기 여행자 입장에선 왜 노점상에서 물건을 사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옛날 서울 지하철 1호선 객차에서 흔히 팔던 추억의 팝송 시리즈나 레이저가 나오는 지휘봉 같은 것도 저걸 누가 살까 싶지만, 꼭 한 칸에 한 분 정도는 관심을 보이지 않던가? 밑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노부부는 결정을 못 했고, 지루해진 난 대체 어떤 물건이길래 이리 결정을 못 내리나 슬쩍 곁눈질하고는 바로 그 자리를 떴다. 수공예 목걸이였다. 이틀 정도면 끊어질 약한 목걸이라는 걸 알기에 ‘나 같으면 안 사.’라고 중얼거렸다.


노부부와 노점 상인


  항구도시는 그 특성상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데, 리스본도 마찬가지다. 포르투갈에는, 특히 리스본에는 이민자가 많다. 해상왕국으로 명성을 날렸던 역사 때문이기도 하고 지리상 아프리카와 가까이 있어 그렇다. 일찍이 15세기 르네상스 시절, 목제 상선이 미지의 바다 저편으로 떠날 때부터 리스본 항구에는 떠나는 사람과 오는 사람으로 분주했다. 최소한 가족 중 한 명은 바다 건너에서 오거나 바다 건너로 간 사람이 있을 만큼 리스보아타(Lisboata), 즉 리스본 현지인들에게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익숙했다. 그들의 내세우는 슬로건 중 하나인 ’City of Departure and Arrival’ 즉 떠남과 도착의 도시인 것이다. 

  사실 그 시절에 떠난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배에서 내리는 이를 맞이하는 리스보아타들이 다른 유럽인들보다 더 관대하고 호의적인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종종 다른 여행자로부터 ‘여기는 인종차별이 다른 곳보다 덜하다’란 말을 들었는데, 아마 1497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크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를 발견했을 때부터 다른 피부와 다른 언어, 다른 문화의 사람들을 열린 태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리스본 이민자들은 ‘차이나타운’이나 ‘리틀 도쿄’ 같은 특정 나라의 밀집 지역 없이 모두 잘 어울려 산다. 다른 문화와 더불어 사는 삶은 리스본 이민자 문화의 바탕이 되었고, 이건 지금도 관광지를 살짝 벗어난 모라리아(Mouraria), 마르띵 모니즈(Martim Moniz), 인텐덴떼(Intendente) 같은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난 관광지보다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더 매력을 느꼈다. 치안이 약한 곳도 있지만 거리를 지날 때 느끼는 인생의 활기는 여유와 나른함이 먼저 다가오는 다른 지역과는 성격이 확실히 달랐다. 리스본에서 역동성이라니! 고요한 리스본을 그나마 뛰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이민자들이라고 난 믿는다. 재미나게도 난 리스본 외 다른 도시에서도 이민자 지역을 즐겨 찾았다. 베를린의 노이쾰른(Neukölln)이나 모아빗(Moabit)이 대표적이다. 아마 동질감이었을 거다. 어딜 가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떠난 자의 죄책감을 짊어지고 억척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같은 처지 때문이었을 거다. 이민자야말로 한 도시의 문화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태주 강 앞에서.


  며칠 후 그때 그렸던 스케치를 완성하며 흑인 청년과 노부부가 생각났다. 그리고 궁금했다. 노부부는 장신구를 샀을까? 그 청년은 아프리카 어디에서, 어떤 경로로, 어떤 꿈을 안고 리스본까지 왔을까?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자 그 흑인 청년의 인생 역경이 미니시리즈처럼 그려졌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오는 비자를 받는 게 하늘의 별 따기인데, 엄청나게 고생했겠지? 뇌물을 바쳤어야 했을지도 몰라. 아니면 밀항했을까? 겨우 도착한 이곳에서 같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하여 마르띵 모니즈 한구석에 다른 아프리카 청년들과 방을 얻었겠지. 그리고 그 좁은 방에서 북적북적 어깨를 부딪치며 살겠지. 아프리카인들이 많이 모이는 ‘성 도밍고(Sao Domingos)’ 성당 광장에 모여 고단한 날들의 스트레스를 풀겠지. 물건은 어디서 공수했을까? 노점상으로 버는 돈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그래도 그중 일부는 고향으로 보내겠지? 그리고 떠나온 이유를 생각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겠지. 이미 난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캐스팅까지 끝낸 상태다. 이 시나리오는 내가 가진 편견일까? 편견이더라도 왠지 모를 짠함과 공감이 퍼지고 감정이입이 된다. 눈 한번 안 마주치고 말 한번 섞지 않은 청년이지만, 그 청년이 지금 잘살고 있기를.  


그때 그린 스케치.


  난 ‘네덜란드 국적을 가진 아이의 부모’의 자격으로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다. 체류권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내게 ‘이민’이란 단어는 아주 큰 산이다. 복잡한 서류는 물론이고 얼굴엔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태도만은 고압적인 이민국 직원 앞에서 변죽을 부릴 때마다 난 상상 이상으로 작아진다. 서류 몇 장을 기반으로 오직 그들의 판단하에 내 존재를 인정받는 지난한 행정 절차를, 내 모든 정체성이 ‘이민자’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지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더럽고 치사한) 순간들을 담담히 목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이 문구를 생각한다. 바로 리스본의 ‘성 도밍고(Sao Domingos)’ 성당 광장에 있는 벽에 세계 각국의 언어로 새겨져 있던 이 문구.

- Lisboa, cidade da tolerancia, 

  즉, 리스보아, 관용의 도시

  바다같이 넓어서 사람들이 쉽게 바다로 착각하는 리스본의 테주강이 이민자들을 바다 같은 관용으로 품어주었을 것이다. 혐오와 배척, 편견과 차별이 점점 더 커지는 때에 더 많은 도시가, 나라가, 아니 세상이 리스본처럼 관용의 바다로 모든 이를 품길 진심으로 빈다. 아울러 당신에게도 관용의 마음이 퍼지길 빈다. 


리스보아, 관용의 도시


All photos and drawings by Yellow 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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