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시' 시리즈 - 나이로비 이야기
이 글은 최대한 건조하게 쓰겠다. 그게 내 마음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때문이다. 전후 사정이 길지만 각설하고, 2009년 12월 13일 난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Nairobi)행 비행기를 탔다. 아프리카는 처음이었다. 당시 오지 탐험 어쩌고 해서 주류권 외의 여행이 유행하던 때라 아프리카 여행 관련 책이 많이 나왔는데, 떠나기 전 그 책들을 뒤적이긴 했으나 딱히 다가오진 않았다. 나이로비로 가는 내 목적은 사파리가 아닌 카밀과 함께 보육원을 짓는 거였으니까.
우리는 케냐 현지 친구들과 케냐의 서쪽 키수무(Kisumu) 지역에 보육원을 짓기 위해 나이로비에서 후원자를 찾고 있었다. 케냐 친구들인 에릭, 조프리 형제와 윌리스는 나이로비의 동쪽 카욜레(Kayole)란 동네에서 살고 있었는데, 세계 3대 빈민촌 중 하나인 키베라(Kibera) 같은 극빈촌은 아니지만 그래도 빈민가에 속했다. 삭막한 동네였다. 회색 콘크리트 건물의 마감되지 않은 벽돌과 벌거벗듯 삐죽삐죽 튀어나온 철골이 그 분위기를 더했다. 길은 정비가 안 된 흙길로, 건조한 날엔 엄청난 흙바람을 내다가도 비가 오면 사방이 질척거려 걷기가 힘들었다. 쓰레기는 지천으로 널렸고 하천에선 아이들이 구정물에서 물장난했고 그 옆으로 당나귀가 무거운 짐을 지고 지나갔다. 외국인이 드문 이곳에 카밀과 내가 장이라도 보러 나오면 사방에서 ‘므중구! 므중구!’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므중구: Mzungu, 스와힐리어로 ‘백인’이란 뜻) 여기서 우리는 하얀 얼굴을 한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사회학과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에릭과 조프리는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직업이 없었다. 윌리스 역시 졸업을 앞두고 한참 구직 중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케냐의 청년 실업 역시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어서, 해마다 대학은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지만 사회는 그들을 받아줄 여력이 없었다. 이들의 일과는 주로 소파에 파묻혀 TV나 DVD를 보는 걸로 채워졌다. 이들은 방 2개가 연결된 작은 집에서 살았다. 녹색 현관문을 열면 소파 세 개와 TV 선반이 공간을 꽉 차지하는 거실이 있고 그 옆에 침실이 있었다. 침실 역시 침대, 옷장, 테이블로 꽉 찼는데, 테이블이 부엌 역할을 하는지 그릇, 컵, 주방 도구, 파라핀 난로 등이 널려 있었다. 그 작은 공간에 가구는 왜 그리 큰지, 사람을 위해 가구가 있는 게 아니라 가구를 위해 사람이 들러리로 있었다. 나중에 다른 집에도 엄청난 크기의 가구들이 빽빽이 들어선 것을 보고 그게 케냐의 문화라는 걸 알았다. 건물 복도에는 이웃과 함께 쓰는 공용 화장실이 2개 있고 그 옆에 설거지와 세수를 하는 공용 세면대가 있었다. 수도시설이 없어 매주 목요일마다 동네를 찾는 물장수에게 물을 사거나 빗물을 받아서 보관했다. 식수용 물통 하나와 기타(빨래, 설거지, 청소, 샤워 등) 물통 하나. 물이 항상 모자라니 영리한 분배가 필요했다.
우리는 이 집에서 근 한 달을 지내며 보육원 기금 마련에 몰두했다. 친구들은 카밀과 내게 침실을 내주었고, 본인들은 소파에서 자거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축구 경기가 있을 때마다 친구 집에서 경기를 본 후 자곤 했다. 난 그 상황이 미안했는데 그들은 오히려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밀이 상황에 보답하기 위해 항상 지갑을 열었기 때문이다. 빵과 우유가 비싸서 못 산다기에 아침마다 빵, 우유, 버터, 커피, 바나나 등을 샀고 저녁마다 재료를 사 와 팔을 걷어붙이고 요리했다. 덕분에 친구들은 평소 먹을 수 없었던 샐러드, 카레, 스파게티 등을 자주 먹을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카밀과 날 위한 것이기도 했다. 우갈리(밀로 만든 케냐 전통음식)나 만다지(도너츠처럼 튀긴 밀가루 음식) 같은 케냐 음식만 매일 먹는 건 곤욕이었으니까.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카밀의 지갑은 그들이 신문을 살 때도, 이발소에 갈 때도, 말라리아 때문에 병원에 갈 때도 열려야 했다. 소문이 나서 다른 동네 친구들도 붙었다. 카밀은 서서히 ‘카욜레의 걸어 다니는 현금 인출기’가 됐다. ‘백인은 다 봉이야 뭐야?’ 그는 투덜댔고 슬슬 친구들과 다니는 걸 피하게 됐다. 한 마디로 치사해졌다. 처음부터 숙박비를 냈다면 깔끔했을까? 서로 편견 없이 친구가 됐다고 느낄 즈음 이런 어정쩡한 상황에 놓이다니, 역시 공간을 같이 쓰면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문제는 항상 돈이다.
드디어 폭탄이 터졌다. 닭 때문이었다. 닭. 맞다. 꼬꼬댁~ 바로 그 닭. 어느 날 카밀과 난 저녁 초대를 받았다. 에릭과 조프리의 어머니가 당신의 생신 잔치를 우리와 함께하고 싶다고 하셨다. 갑작스레 받은 초대에 미쳐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는데, 그때 에릭이 말했다. 어머니가 생신상으로 닭 요리를 만들고자 하는데 닭을 살 돈이 없으니 그 돈을 달라고. 초대해 놓고 재료비를 달라는 건 무슨 경우인가 싶었지만 생신이라니 딱 잘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카밀에게 현금이 없어서 내일 은행에서 돈을 찾아 주겠노라 약속하고 어머니 집으로 갔다. 생신상은 진수성찬이었다. 닭 요리와 시금치 요리, 차파티에 맛있는 후식까지. 무지막지하게 큰 가구들이 온 집을 잡아먹을 듯 꽉 차 있는 그 집에서 우리는 어색한 듯 즐겁게 어머니의 요리를 즐겼다. 문제는 카밀이 다음날 돈 드리는 걸 깜빡했다는 것이다. 조프리는 불평했다. 어머니께서 화가 많이 났다고, 그날 옆집에서 돈을 빌려 닭을 샀기 때문에 빨리 갚아야 하는데 카밀이 주지 않아 옆집에서 난리가 났고 그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고. 폭탄이 터진 건 이때였다.
- 뭐? 어머니 체면? 그럼 내 체면은? 저녁 초대를 받고도 닭값을 내야 하는 내 체면은 뭔데? 내가 너희였다면 자식 된 도리로 여기 있는 DVD를 팔든 TV를 팔든, 어떻게든 돈을 구해 닭을 사드렸을 거야. 그런데 니들은 매일 집에서 TV 보며 시간만 낭비했잖아. 네덜란드에선 그렇게 쉽게 친구에게 손 벌리지 않아! 지금까지 내가 쓴 돈이 얼만데, 난 짜기만 하면 돈이 나오는 젖소가 아니야!
생신 선물로 재료비를 드린다고 생각하면 되었을까? 하지만 그 순간 매우 눌러왔던 무언가가 터진 듯, 무너진 둑 사이로 콸콸 나오는 물처럼 카밀은 퍼부었다. 그가 한 말은 아슬아슬했는데, 자칫하면 친구들을 무능하다고 비하하는 동시에 ‘서양 대 아프리카’, 혹은 ‘백인 대 흑인’의 구도로 만들 수 있었다. 윌리스가 발끈했다.
- 지금 케냐인을 무시하는 거야?
에릭, 조프리, 윌리스, 그리고 카밀 사이에서 고성이 오갔다. 3대 1이었지만 카밀은 지지 않았고 그 속에서 난 탁구공처럼 오가는 말싸움에 고개만 왔다 갔다 했을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돈 때문에 치사해진 모습이 내 앞에 있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었으므로 한바탕 소동 후 카밀은 돈을 찾아 어머니께 갔다. 난 복잡한 마음을 안고 카욜레를 산책했다.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고 무엇보다 매우 슬펐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란한 그래피티와 함께 동네가 떠나가라 힙합을 틀어대는 나이로비의 명물 ‘힙합 버스’는 흙바람을 일으키며 줄줄이 지나갔다. 얼기설기 실타래처럼 엉킨 전깃줄 위에 까마귀가 앉아 까악 까악 울었다. 아이들은 항상 그랬듯 ‘므중구! 므중구!’를 외치며 날 졸졸 따라왔다. 뒤돌아 톡 쏘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얘들아, 난 백인이 아니야.
소동은 일단락됐지만 그 후 관계가 딱딱해졌다. 윌리스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우리를 피했고 그 때문에 자금을 모으는 일이 더뎌졌다. 그래도 일상은 계속됐다. 카밀은 아침마다 빵과 커피를 샀고 에릭과 조프리는 거실에서 잤다. 호텔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카밀의 말에 나쁜 인상만 더할 뿐이었다. 난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계 회복을 위해 애썼다. 며칠 후 그들은 화해했고 다시 ‘브라더!’라 외치며 가슴팍을 부딪쳤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문화와 경제적 간격이 얼마나 좁혀졌을지는 결코 모를 일이었다.
2009년의 일이다. 결론만 말하면, 우린 보육원을 지었고, 친구들에게 지속적인 관리를 부탁하며 케냐를 떠났으나 관리 부실로 오래가지 못했다. 2011년에 다시 케냐로 가서 부활을 도모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들의 소식은 여전히 SNS로 접한다. 가끔 댓글을 쓰긴 하지만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좁히지 못한 간격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다.
나이로비는 내 노마드 인생을 시작한 첫 도시지만 결코 낭만적으로 추억할 수 없는 도시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내가 냉소를 배운 도시고, 세상의 온갖 더러운 부조리를 제대로 목격한 도시고, 운명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게 된 도시고, 관계의 허무함을 톡톡히 배운 도시다. 써놓고 보니 온갖 비극을 다 모은 듯하다. 누구는 ‘이거 서울인데?’ 할지도 모르겠다. ‘이걸 나이로비까지 가서 알았다고?’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서울이든 나이로비든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건 내가 이 모든 비극과 싸우는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거다. 내 세상은 달라졌고, 그렇게 제다이 수련이 시작되었다.
케냐를 떠나던 날 새벽, 마지막으로 우리를 배웅한 건 에릭이었다. 그는 택시 기사가 우리에게 바가지요금을 씌울까 봐 직접 택시를 잡고 기사에게 말했다. 내 브라더니까 절대로 딴생각 품지 말라고. 택시 백미러로 멀어지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