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시' 시리즈 - 이스탄불 이야기
난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산다. 이름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요즘 자주 내게 밥을 주는 '승연'이란 인간은 날 ‘시아(siyah)’라고 부른다. 터키어로 ‘검다’란 뜻인데, 날 이렇게 부르는 건 내가 검은 고양이이기 때문이다. 참 얄팍한 창의력이다. 내가 사는 동네는 카심파샤(Kasimpaşa)란 동네다. 이스탄불 내에서도 집값이 제일 싸고 집시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동네로 불리지만, 관광 지역인 탁심(Taksim)과 갈라타(Galata) 타워가 가깝고 또 이스탄불 경제를 부흥시킨 국무총리 에르도안(Erdogan)이 이 동네 출신이라 그의 이름을 딴 경기장도 있어서 제법 활기차게 북적이는 곳이다. (에르도안은 후에 터키의 대통령이 되어 장기 집권한다. 지극히 호불호가 갈리는 대통령이라 말을 아끼는 게 좋겠다)
언제부터 여기서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기억의 끝자락부터 난 여기에 있었다. 이스탄불이 꽤 넓지만 솔직히 다른 동네는 안 끌린다. 괜히 센치할 때 가슴이 뻥 뚫리는 보스프러스(Bosphorus) 해협까지 내려가 시원한 바람 좀 쐬고, 낚시꾼들이 주는 물고기를 먹기도 하지만 점점 가기가 귀찮아진다. 내 주요 행동반경은 큰길인 바리예(Bahriye) 대로와 경기장 사이다. 사람들은 단지 집시가 산다는 이유로 위험한 동네라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 나를 포함, 내 친구들을 돌보는 이들은 자비롭고 친절하기 그지없다. 특히 내가 자주 가는 오젠(Özen) 식품점의 아흐멧 아저씨는 아침저녁으로 날 부르며 내 안부를 체크한다. 아저씨는 날 ‘고집 센’이란 뜻의 ‘이나츠(inatçı)라고 부르는데, 처음 몇 번 쓰다듬는 걸 거부했더니 그런다. 사람처럼 어쩔 땐 좋고 어쩔 땐 퉁명스러운 건데, 그걸 이해 못 하고 저런다. 하지만 난 아저씨가 좋다. 아저씨 가게 앞, 간이 의자에 누워 흐드러지게 낮잠 자는 게 내 취미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의 조상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다. 무슨 얘기냐고? 옛날 옛적, 동굴에서 기도하던 무함마드에게 독사 한 마리가 다가가자 우리의 조상인 고양이 무에자(Muezza)가 그 독사의 머리를 물어뜯어 무함마드를 구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우리가 영묘하고 신과 교류한다고 믿는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신의 목소리 같은 건 일언반구 들은 적이 없는데 우리에게 온갖 의미를 부여하다니. 그저 처음 뱀을 쫓았던 용감한 조상님께 감사할 뿐이다. 덕분에 오늘도 편하게 산다. 터키 사람들은 길 위의 우리를 그들 삶의 일부로 받아준다. 어디든 사료와 물통이 있어 굶어 죽을 걱정 없고 누구든 우리를 사랑으로 쓰다듬고 보살펴 준다. 오토바이나 차에 치여 죽을지언정 사람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물론 나도 받은 만큼 최대한 내 사랑을 표현한다. 사람들이 날 쓰다듬으며 행복해하는 걸 볼 때마다 내 존재 가치를 느껴 기쁘다. 무함마드는 ‘살아있는 동물에게 행한 모든 선한 일에는 진정한 하늘의 보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인간들이여, 부디 동물과 함께 사는 삶을 소중히 여기길. 난 다음 생에도 이스탄불 고양이로 살고 싶다.
때는 바야흐로 2012년 1월. 요즘은 앞서 말한 승연이란 인간이 내게 마음을 열었다. 승연과 그녀의 남편 카밀이 이 동네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건 작년 크리스마스부터다. 원래 외국인이 안 사는 동네인데, 어느 날 젊은 외국인 한 무리가 나타났다. 들은 바 없는 희한한 언어를 쓰길래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경계만 했는데, 하루는 호기심을 못 이기고 그들 뒤를 따라갔다. 알고 보니 아흐멧 아저씨 가게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새 그 집을 ‘여반즈 에비(yabancı evi)’, 즉 ‘외국인 집’이라 불렀는데, 취합한 정보에 따르면 터키어를 공부하러 어학연수 온 미국인 학생들이었다. 미국은 아주 먼 나라라던데 여기까지 오다니, 신기한 인간들임이 틀림없다. 승연과 카밀이 등장한 건 이들이 이 집으로 이사 왔기 때문이다. 집은 작고 좁은 4층짜리 건물인데, 지층에 방 하나, 2층에 방 하나, 3층에 방 하나와 화장실, 4층에 부엌과 거실, 그리고 옥상이 있는 독특한 구조의 건물이다. 승연과 카밀 외에 오웬(Owen), 로라(Laura), 그녀의 프랑스인 남편 루이(Louis)가 살고, 에믈린, 도미니크, 켄 등 매일 새로운 외국인 친구들이 하루가 멀다고 드나든다. 이들은 옥상을 통해 들어온 나를 내쫓지 않고 소파에서 뒹굴 수 있게 해 준다. 내가 오렌지색 소파에 검은 털을 남겨도 불평하지 않는 모두 착한 인간들이다. 보면 볼수록 다들 한 캐릭터 한다. 종일 아코디언을 연습하는 오웬 하며, 얼굴이 너무 예뻐서 오히려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로라 하며, 단 몇 달 만에 완벽한 터키어로 내게 말을 건네는 언어 천재 에믈린 하며, 자기 몸속에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있다고 선언한 도미니크까지… 인간들의 젊음이란 이런 건가? 이 사이에서 승연과 카밀은 지극히 평범하고 고루하기까지 하다. 이들을 보며 내 인간 탐구의 폭을 넓힌다.
흠, 떠들다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다. 곧 기도가 울리겠지. 여기는 해의 위치에 따라 하루 다섯 번 사방팔방에서 이슬람 기도 소리가 메가폰을 타고 울린다. 누구는 시끄럽다고 싫어하는 이 기도를 승연은 무슬림도 아니면서 무척 좋아하는데 (인정한다. 어떤 사원의 기도는 못 들어줄 정도로 꽝이다. 다행히 우리 동네 기도자는 실력이 좋다) 그래서 항상 이맘때쯤 그녀는 기도도 들을 겸 옥상으로 밥을 가지고 온다. 잠도 실컷 잤겠다, 슬슬 밥 먹으러 가야겠다.
건물의 옥상 뷰는 제법 좋다. 보스프러스 해협의 비릿한 짠 냄새가 겨울바람에 실려 여기까지 온다. 보라색을 머금은 붉은 주단이 겹겹으로 흐르는 하늘에 저 멀리 루스템 파샤(Rüstem Paşa) 사원이 검은 실루엣을 드러내고 끼룩끼룩 갈매기가 그 모습을 가른다. 곧 승연이 나타난다. 나 말고도 여러 마리가 있는 걸 아는지 꽤 넉넉하게 밥을 가지고 왔다. 내가 좋아하는 정어리다. 난 바로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승연은 기도를 음미한다. 정신없이 먹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승연이 쪼그리고 앉아 물끄러미 날 보고 있다. 평소와 다르게 길게 본다. 그녀가 입을 연다.
- 시아야, 있잖아… 내가 원래 고양이는 그냥 그랬거든. 그런데 여기 살면서 좋아졌어. 특히 널 보며.
당연하지, 이스탄불 고양이의 매력을 누가 거부할쏘냐. 그런데 이 인간, 오늘따라 오글거리게 웬일이지?
- 시아야, 우리 내일 카디코이(Kadikoy)로 이사 가. 너한테 정이 많이 들었는데 아쉽네. 그 동네엔 또 다른 고양이들이 있겠지? 거기서도 고양이에게 잘할게. 건강하게 잘 지내렴.
아, 승연과 카밀이 떠나는구나. 카디코이? 강 건너편이군. 좋은 동네라고 들었는데 갈 엄두가 안 나네. 거기 가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내가 뱃멀미를 하거든. 승연이 내 머리와 목 밑을 마구 쓰다듬는다. 난 드러누워 그 사랑을 아낌없이 받는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그러자 내일부터는 정어리 밥을 먹으러 옥상으로 올 일이 없다는 아쉬움이 바로 덮친다. 떠난다니까 아쉽네… 기도가 끝이 난다.
혹자는 내 실체를 의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난 승연이 근 10년 전의 기억을 파헤쳐 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고양이니까. 확실치 않은 기억에 기대다 보니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알 수 없지만, 최소 이스탄불 고양이의 일반적인 삶은 진실이 분명하다. 사실 숭연의 상상력이라면 진짜로 난 아홉 번의 생을 살지도 모르고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난 내게 작별을 고하며 마지막으로 밥그릇을 건넨 이 인간의 운명이 어찌 될지를 안다. 그녀는 카밀과 다시 케냐로 갈 것이다. 거기서 뜻하지 않게 임신할 거고 한국에서 미루라는 예쁜 여자아이를 출산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떠나는 걸 멈추지 않을 것이다. 먼 훗날 괴상한 바이러스 때문에 잠시 네덜란드라는 나라에서 머물지도 모르지만, 난 안다. 이 인간과 그 가족은 계속 떠날 거라는 걸. 왜냐면 딱 봐도 이들은 나와 같은 부류거든. 어떤 부류냐고? 바로 길 위에서 편한 부류.
잘 가게, 친구. 자네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길. 난 아홉 생을 살아도 이곳 카심파샤를 지킬 걸세. 자네는 떠나는 길이 편하지만 난 머무는 길이 편하니까. 언젠가 다시 온다면 날 잊지 말고 찾아주게. 그때는 내 이름이 시아가 아닐지도 모르니 지금 내 얼굴을 잘 보고 기억해주게나. 테크랄 요르수르즈!
* 테크랄 요르수르즈 (Tekrar görüşürüz): 터키어로 '다시 만나요'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