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2W 매거진 28호 '운동하는 여자들' 기고글
내 키는 149.7cm다. 반올림해야 겨우 150이 되는 작은 체구의 소유자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은 겪지 않을 불편을 자주 겪는다. 슈퍼 선반의 물건에 손이 닿지 않아 종업원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다반사고 자동차 브레이크에 발이 닿지 않아 운전은 꿈도 못 꾸고(자전거도 청소년용 자전거를 타야 한다) 설거지할 때도 작은 스툴을 밟고 올라가야 싱크대와 레벨이 맞으며 몸에 맞는 사이즈 옷을 찾기 힘들어 아동복 코너로 갈 때도 있다.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던 초등학교 시절, 4번을 넘긴 적이 없던 그때부터 평생을 ‘키 작은 사람’으로 살아온 나. 그래서 슬프냐고?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선천적인 자존감으로(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난 기쁘게 세상 모든 걸 (말 그대로) 우러러보았다. 우러러볼 게 많은 이 세상은 얼마나 찬란한가! 하여, 난 키 작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이득을 취하며 지금껏 잘 살았다.
그런데 먹히지 않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운동이다. 특히, 공으로 하는 단체 운동. 운동 신경이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는 난 어렸을 때 (여학생 지정 운동이었던) 피구, 발야구 등을 좋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내 성장판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거부했고 결국 난 뼈아픈 팩트를 받아들여야 했다. 아무리 발이 빨라도 키 작은 여학생이 할 수 있는 단체 운동은 피구밖에 없다는걸. 작아도 정도껏 작아야지, 150도 안 되는 심히 작은 체구는 피구에서 ‘톰과 제리’의 제리처럼 날아오는 공을 잽싸게 피할 때만 유리할 뿐 다른 운동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난 발야구 투수를 맡기 위해 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커브까지 연구하며 연습했지만, 결코 한 손으로 공을 잡아, 볼링 하듯 던지는 상대편 친구를 이길 수 없었다. 한 손으로 잡기에는 내 손은 너무 작았으니까. 그렇다면 야구는 어떨까? 배구공이 크다면(당시 발야구는 배구공으로 했다) 야구공은 작잖아. 하지만 이번에는 남자아이들이 날 끼워주지 않았다. 내가 던지는 공 속도가 꽤 빨랐음에도 ‘여자는 야구 하는 거 아니’라며 저리 가라고 했다. 하지만 얘들아! 내가 야구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래 봬도 ‘MBC 청룡’ 어린이 회원이라고! 커서 야구 선수와 결혼할 거라고! (아아~ 프로 야구가 탄생했던 1982년 원년의 흥분을 어찌 잊으리! 투수하면 박철순, 포수하면 이만수, 타자하면 장효조, 유격수하면 김재박, 도루하면 신경식! 이 흥분을 같이할 사람, 누구 없소?) 야구가 이런데 축구나 농구는 어련할까. 왜 난 숏다리로 태어났으며, 왜 하필 (분수를 모르고) 개인 운동보다 공으로 하는 단체 운동을 좋아 해서 이 수모를 겪어야 할까? 공이 작은 탁구나 테니스, 정 안 되면 배드민턴을 하라고? 하지만 그건 단체가 아니잖아. 그리고 왠지 안 당겨.
성인이 되어 단체 운동 대신 마음 가는 개인 운동을 찾을 때도 내 키는 걸림돌이 됐다. 태국에서 살 때 접한 무에타이는 딱 내 취향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도장이 문을 닫자 선생님을 따로 섭외해(그것도 지역 무에타이 챔피언!) 개인 레슨까지 받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킥할 때 샌드백에서 뻥! 하고 울리는 그 소리의 희열이란! 획 하고 바람을 가르는 내 발차기는 꽤 그럴싸했고(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그때 내 다리가 숏다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희열을 못 잊어 지금 사는 네덜란드에서도 무에타이 도장을 찾았는데, 아뿔싸, 하나 간과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네덜란드가 거인국이라는 것! 울퉁불퉁 이두박근을 자랑하는 상대 남자는 단상의 독재자처럼 날 내려다보았고, 그를 우러러보며 앞이 아닌 하늘로 뻗는 내 펀치는 먼지처럼 초라했다. 그의 배꼽에도 못 미치는 내가 어찌 그의 대련 상대가 될 수 있으리. 그래, 옛날에 태권도 배울 때도 내 상대는 늘 갓 열 살을 넘긴 어린이였지. 도장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즉 너무 커서 헐렁한 글러브와 내 다리보다 더 긴 무릎 보호대를 가누지 못해 목각인형처럼 휘청이는 내 모습을 보며 난 생각했다. 다리가 짧아 슬픈 그대여, 너에겐 죄가 없나니, 영양가 없이 멀거니 키만 큰 이들을 탓하라. 분명 너에게 맞는 운동이 있을지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 후 난 도장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돌고 돌아 안착한 게 달리기다. 수영은 수영장이 너무 멀었고, 볼링은 볼링공의 구멍 3개가 너무 컸고, 실내 클라이밍은 다리가 짧았고, 자전거 역시 다리가 짧았으며 (어린이용을 타는 건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피트니스나 요가는....... 더 이상 묻지 말라.
달리기는 달랐다. 다리가 짧아도 가능했고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대련 상대가 없어도 되었고 심지어 돈도 들지 않았다. 순전히 내 의지로 어느 때나 운동화 끈 질끈 묶고 나가면 될 일이었다. 단체가 아닌 혼자 하는 외로운 운동이었으나 방탄소년단 노래와 함께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무아지경으로 달리는 즐거움은 무에타이 킥의 그 희열과 다름없었다. 이 즐거움을 10년만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드디어 내 운동을 찾았구나!
그러나 그 순간도 잠시, 건강히 오래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운동해야 하는 나이가 된 지금, 이제는 키가 아닌 무릎이 방해하고 허리가 방해한다. 다들 네 나이가 몇인데 몸 생각해서 뛰지 말고 걸으라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을 오르면 무릎이 시리고 스트레칭 잘못하면 허리가 삐끗한다. 검색창에 ‘퇴행성 관절염’ 같은 단어를 치기도 한다. 하아, 인생이여, 운동 하나 제대로 하기가 왜 이리 어렵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달린다. 키 때문에 포기했던 여러 운동이 억울해서 달린다. 어떻게 마음 붙인 운동인데, 이마저 놓치기 싫은 마음에 달린다. 무엇보다 달리는 내가 좋아서, 건강하고픈 내 몸이 너무 소중해서 달린다. 달리기만큼은 웬만해선 날 막을 수 없다. 오늘도 난 아침 8시 반까지 아이를 등교시킨 후 방탄소년단 노래가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학교 옆 호수로 달려 간다. (무릎 때문에) 걷고 뛰는 걸 반복하며 바른 자세로 천천히 세 바퀴를 돌고 집에 오면 딱 7km다. 그 7km의 땀이 실로 꿀 같다. 이제 곧 겨울인데, 장대비가 내리지 않는 한 훕, 훕, 하, 하, 내쉬는 호흡에 추위를 떨치며 계속 달리고 싶다.
안타깝게도 난 아직 나와 눈을 평행으로 마주칠 만큼 작은 성인을 만나지 못 했다. 거인국 네덜란드에서 사니 만날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그래도 만약에, 0.1 퍼센트의 확률이지만 만약에, 나처럼 작은 키의 소유자를 만난다면 난 버선발로 뛰어가 그를 격하게 끌어안을 것이다. 그대여, 나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군요! 그리고 한국 가수 중에 이승환이란 가수가 있고, 그가 부른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다고, 우리 같은 숏다리를 위한 주제곡 좀 들어보라고 할 것이다.
- 덩크슛! 한 번 할 수 있다면, 내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얼마나 짜릿한 그 기분을 느낄까아아아~!
그리고 이렇게 제안할 것이다.
- 저와 함께 달리지 않으실래요?
그렇게 난 모닝 조깅 클럽을 결성한다. 숏다리 조깅 클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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