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 나 한때 6개 국어 하던 여자야!
내 얘기라면 얼마나 좋겠냐만 미루 얘기다. 미루는 한때 6개 국어를 했다. 물론 문장이 아닌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었지만. 30개월쯤 미루의 주변에는 한국어, 네덜란드어, 영어, 포르투갈어, 독어, 체코어가 왔다 갔다 했다. 특히 많은 시간을 보낸 또래 친구의 주요 언어가 포르투갈어, 독어, 체코어였다. 자연스레 친구들이 쓰는 단어를 흡수했다. 미루가 말했던 ‘엄마’의 변천사가 재미있다. 엄마(한국어) –> 마마(영어, 네덜란드어) –> 마이 (포르투갈어) –> 마밍꼬 (체코어의 ‘엄마’ 애칭). ‘물’도 포르투갈어로 ‘아구아(agua)’ 하더니 체코어인 ‘보다(voda)’라고 했고, 부정어도 포르투갈어로 ‘나우(nao)’ 하더니 독어로 ‘나인(nein)이라고 했다. 창문을 열어달라며 영어로 ‘오픈(open)’ 했고, 원하는 걸 가리키며 한국어로 ‘이거’라 했고, 예쁜 걸 보면 네덜란드어로 ‘예쁘다’인 ‘모이(mooi)’라고 했고, 식사하기 전엔 독어로 ‘구튼 아프팉(Guten Appetit)!’했고, 아플 땐 포르투갈어로 ‘아프다’인 ‘도이(doe)’라고 했다. 세상에, 이렇게 뒤죽박죽이어도 되는 건가? 친구들은 이러다 언어 천재 되는 거 아니냐며 농담했지만, 팽팽 돌아갔을 30개월 아이의 머릿속이 안쓰러워 괜히 미안했다.
물론, 현재 미루는 이 단어들을 기억 못 한다. 하지만 여전히 최소 3개의 언어와 씨름한다. 한국어, 네덜란드어, 영어. 저녁상에서 3개의 언어가 탁구공처럼 오간다. 네덜란드에서 사는 지금은 네덜란드어가 제1 언어가 되어 제일 편하게 말하고 영어와 한국어가 그 뒤를 잇는다. 요즘 한국어 실력이 줄어들어 내 어깨에 놓인 짐이 만만치 않은데, 한국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눈을 굴리는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언어의 무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약 6천 개의 언어에 압도된다. 도대체 이 세상에 언어는 왜 이리 많은지!
내가 어렸을 땐 중학교에 가서야 영어를 배웠다. ‘정철 중학 영어’와 ‘시사 중학 영어’라는 게 처음 나왔고, 누군가 ‘하우 아 유?’하면 반드시 ‘파인 땡큐, 앤드 유?’해야 하는 줄 알았다. 영어의 존재는 그야말로 충격이었고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영어가 좋아서 열심히 공부했고, 한국어만큼 편해졌고, 그거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오만이었으니, 영어만으로는 택도 없었다. 칫, 세계 공통어라더니! 유럽에 살며 난 언어 감옥에 갇혀버렸다. 터키에서 살 때 터키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독일에서 살 때 독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포르투갈에서 살 때 포르투갈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현재 네덜란드어를 공부하지만 이 역시 성공할지 불확실하다. 봐도 볼 수 없었고 들어도 들을 수 없었고 말해도 말할 수 없었다.
문득 6년 전 혼자 2주간 영국을 여행했을 때가 생각난다. 유럽을 벗어나 런던의 리버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순간 마치 심봉사처럼 눈과 귀가 뻥 뚫려서 놀랐었다. 가게의 간판도, 통화하며 걸어가는 사람의 대화도, 정류장에 울려 퍼지던 안내 방송도, 굳이 언어와 싸울 필요 없이 360도 날 둘러싼 모든 게 저절로 눈과 귀에 쏙쏙 들어와 ‘이해’됐을 때의 그 기분이란! 해방감! 자유! 난 방언하듯 사람들을 붙잡고 얘기했다. 옆에 앉은 버스 승객과, 슈퍼마켓 캐셔와, 박물관 직원과… 스몰 토크가 이리 즐거울 줄이야! 정신없이 영어의 바다를 헤엄치며 ‘나 실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뽐내고 다녔다. 새삼스레 느꼈던 언어의 힘. (아, 물론 런던을 벗어나자 ‘뭐라고요? (Pardon?)’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놈의 엑센트 때문에…)
언어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여기서 해방이란 어떤 언어를 완벽히 습득하여 사고와 생활에 지장이 없는 상태를 말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어떤 언어에도 구속되지 않고 그 자체를 초월한 상태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를 초월한다는 건 어떤 걸까? 언어 이상으로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도구가 있을까? 더글라스 아담스의 SF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를 보면 ‘바벨 피쉬(Babel Fish)’란 게 나온다. 물고기처럼 생긴 작은 도구인데 이걸 귓속에 넣으면 바로 우주의 모든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된다. 가끔 이런 게 실제로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한다. 파파고나 구글 번역기처럼 어색한 번역이 아닌, 관계에 따른 미묘한 뉘앙스까지 간파하는 그런 번역기가 있다면… 내 생각을 표현 못 할 때, 그래서 상대방이 유치원생 대하듯 과장된 몸짓과 큰 목소리로 말하는 걸 찌푸리며 들어야 할 때, 난 바벨 피쉬가 없는 내 귀를 아쉬워하며 언어 때문에 이방인이 되는 상황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속세와 인연을 끊지 않는 한 언어로부터 결코 해방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언어는 정체성이자 권력이다. 내 입에서 미국 악센트의 영어가 나올 때 미묘하게 달라지는 (정확히 말하면 주눅 드는) 사람들의 태도를 느낀다. 입을 다물면 ‘그저 힘없는 외국인’이지만 영어로 입을 여는 순간 더 이상 ‘그저 외국인’이 아니게 되는, 그 섬세한 권력의 줄다리기가 마음을 할퀴는 동시에 흥미롭다. 만약 내가 네덜란드어라는 새로운 권력을 쟁취할 때, 그때 내 위치는 어떻게 변할까? 그걸 확인하고 싶다. 물론, 아주 오래 걸리거나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확률이 더 높지만.
다시 30개월 때 미루의 머릿속을 상상해 본다. 물론 아이는 스펀지와 같으므로 주변의 모든 단어를 빨아들이기에 바빴을 거다. 아이처럼 말랑말랑하고 뽀송뽀송한 머리로 네덜란드어를 빨아들이고 싶지만 이미 마른 바게트 빵처럼 푸석한 내 머리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6개 국어는 둘째 치고, 한국어와 영어마저도 바짝바짝 말라가니까. 내 머리에 수분 공급이 시급한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미루에게서 힌트를 얻는다. 한때 6개 국어 하던 여자니까. 그러자 아주 적절한 한국어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넉살’.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넉살 좋게 말을 잘 거는 미루라면 오늘 아침 복도에서 만난 이웃에게 그 이웃의 강아지를 보며 예쁘다고 호들갑을 떨었을 거다. 미세한 까딱임과 함께 ‘Goedemorgen (좋은 아침) ’하고 끝내는 나와 다르게.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 넉살은 최고의 무기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단어 사전이 아니라 성격 개조다. 자! 외국어를 공부하는 모든 동지 여러분! 다른 것 필요 없고, 우리 넉살을 키웁시다! 넉살의 뜻인 ‘부끄러운 기색 없이 비위 좋게 굴’어봅시다! 모두 화이팅!
하지만 이런 의문은 여전하다. 언어를 안다고 해서 과연 소통까지 안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