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친구야.
오랜만에 편지를 쓴다. 딱히 바쁘지도 않은데, 편지 한 통을 못 썼네. 오늘 날씨가 꿀꿀해서인지 괜히 센치해져서 옛날 감성 내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쓴다. 물론 연필이 아닌 컴퓨터 자판으로 쓰지만.
며칠 전에 네 생각을 많이 했어. 오랜만에 우리 집에 친구 세 명이 와서 엄청 수다 떨고 놀았거든. 점심시간에 와서 밤 12시 넘어서까지, 입이 아플 때까지 길게 수다 떤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자연스레 너와 내가 보낸 시간들이 생각났어. 해외에 살 때 제일 그리운 것 중 하나가 뭔지 아니? 바로 한밤중 전화해서 ‘야, 뭐 하냐? 나와라!’ 하고 부를 수 있는 친구야. 잠바때기 하나 걸치고 슬리퍼 찍찍 끌고 나가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캔 커피 하나에 오징어 뜯으며 두런두런 얘기하는 거. 물론 밤 문화가 강하고 24시간 편의점이 있는 한국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여긴 늦게까지 문을 여는 곳도 없고, 또 즉흥적인 번개 만남을 안 하더라고. 알고 보니 네덜란드인들이 계획성 대장으로 유명하더라. 항상 언제 만날지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하지. 쓰고 보니 더 그립구나! 넌 내가 전화하면 바로 나오겠지? 딸내미 공부 때문에 안 되려나?
해외에서 현지인 친구를 만들기란 절대 쉽지 않아. 당연하겠지. 언어의 벽이 높고 관계를 맺는 과정과 문화가 다르니까. 네덜란드는 어릴 때 친구가 평생 친구로 가는 문화더라. 사회에서 만난 사람이 절친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고, 다들 자신만의 ‘죽마고우’ 그룹이 있어. 어릴 때부터 쌓인 연대감을 뚫고 그 그룹의 일원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우리도 대학교 때 극예술연구회 연극 동아리에서 만나 지금까지 친구잖아. 젊을 때 만든 추억 같은 걸 사회 동료와 만들기는 어렵지.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같은 처지에 있는 한국인이나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외국인 친구들을 찾게 되는 것 같아. 해외 생활의 고단함을 서로 위로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의외의 일이 생겼어. 내게 3명의 네덜란드 친구들이 생긴 거야.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네덜란드어가 제1 언어인 진짜 네덜란드인 친구들! 이름은 줄리아와 린다와 사리. 바로 우리 집에 놀러 와 자정까지 수다 떤 친구들이야. 이들과 난 만날 접점이 전혀 없어. 근처에 살지만 나이도, 하는 일도, 배경도 너무 달라서 스칠 기회조차 없거든.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나게 했을까? 들으면 웃을 거야. 바로 다름 아닌 방탄소년단! 내가 방탄소년단 찐 팬인 거 알지? 정식으로 ‘아미’라는 타이틀은 없지만 이들에 대한 내 마음은 누구보다 진심이지. 중년 아줌마가 아이돌 덕질이라니, 누군 한심하다고 하겠지만 무슨 상관이야? 나쁜 짓도 아닌데, 좋은 걸 어쩌라고.
이들은 인터넷으로 만났어. 내가 네덜란드어 공부를 위해 언어 교환 친구를 찾는 글을 올렸거든. 무료로 네덜란드어를 배울 수 있는 기관이 있긴 하지만 나랑 안 맞더라고. 좀 더 재미있게 공부할 방법을 찾다가 언어 교환을 생각했지. 내가 사는 이 작은 소도시에서 한국어에 관심 있는 사람을 어떻게 찾을까 고민했는데 의외로 고민은 쉽게 풀렸어. 요즘은 K가 대세잖아. K팝, K드라마, K영화… 한참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유행할 때 암스테르담 한복판에 대형 소녀 인형이 나타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칠 정도였거든. K 문화 콘텐츠를 덕질하는 외국인만큼 한국어에 관심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래서 페이스북에 있는 방탄소년단 네덜란드 그룹에 글을 올렸지. 세상에, 댓글이 줄줄 달리더라고! 그리고 어렵지 않게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를 찾을 수 있었어.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던 날은 바로 멤버 중 한 명인 제이홉의 생일이었어. 예전 같으면 이날은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날이었겠지만 지금은 다르지. 생일이야말로 모이기 좋은 핑계잖아. 난 같이 이날을 즐기자며 이들을 초대했고 삼겹살과 된장찌개로 이들을 반겼어. 줄리아는 케이크를, 사리는 방탄소년단 포스터를, 린다는 디저트를 가지고 왔지.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어. 최애 멤버는 누군지, 최애 노래는 뭔지, 나아가 전반적인 한류 문화와 옛날 스타까지. 이들은 슈퍼주니어도 알고, 이효리도 알고, 에픽 하이도 알았어. 심지어 내가 모르는 드라마나 연예계 소식까지 알려줬지. 이들의 지식과 열성이 신기하더라. 언어 교환 명목으로 모였지만 언어는 개뿔, 사실 이건 덕질의 모임이지. 방탄 사랑을 쏟아내기 바쁜데 주어는 뭐며 동사는 뭐며, 이럴 겨를이 어디 있겠어? 대화는 영어로 했지만 이들은 한국어 노래 가사와 멤버들의 대화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했고, 난 자세히 알려줬어. 반대로 이들은 내가 설명한 한국어 표현을 네덜란드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알려줬지. 이야말로 진정한 일타쌍피의 문화 외교 아니겠니?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뭘까 생각해.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거기서 뻗어갈 수 있는 수많은 연결 고리를. 그 작은 고리에서 귀한 우정이 싹틀 수 있을 거야. 그 고리를 단단하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내가 봤을 땐 현재로서는 덕질이야.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려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지. 덕질은 세상에 닿으려는 열망이야. 종류는 무궁무진해. 나처럼 스타를 덕질할 수도 있고 취미 활동 같은 피규어 수집, 타로, 앤틱, 서핑, 자전거, SF까지, 찾아보면 정말 다양할 거야. 결국 핵심은 ‘공감’이겠지? 친구 사귀는 얘길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덕질 찬양으로 가고 있네.
변하지 않는 내 방탄소년단 최애 곡인 ‘Save Me’의 후렴구 가사를 알려줄게.
- 그 손을 내밀어 줘 / Save me, Save me, / I need your love before I fall
인간은 결국 인간이 내민 손에 의해 구원되고, 요즘 시대에 그 손을 내밀게 하는 힘은 바로 뭐다? 덕질! 자, 고달픈 타지 생활에서 친구를 만들려면 덕질을 할지어다! 당신을 save 해줄지니!
이 3인방과는 계속 만날 거야. 방탄 맴버가 7명이니 생일 핑계로 최소 1년에 7번은 만날 수 있어. 그때까지 채팅방에서 하루가 멀다고 방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수다를 떨겠지. 너랑 나랑 할 수 있는 덕질은 뭘까? 아무래도 연극이겠지? 요즘 공연 자주 보니? 수업 땡땡이치고 너랑 김밥 까며 극예술연구회 동아리방에서 노닥이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동아리 노트 ‘멍꽁장’에 쓰잘데기없지만 나름 심오한 글들을 끄적였었지. 그때 우리 참 젊었다, 그치?
보고 싶다. 친구야. 다음에 한국 들어가면 같이 대학로 거리 한 번 걸어보자꾸나. 그리고 우리의 화양연화를 떠들어 보자꾸나.
그리운 친구에게, 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