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아줌마 머리 속엔 뭐가 있을까 #20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022년 9월 20일

by Yellow Duck


이 아줌마 머리 속엔 뭐가 있을까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0


2022년 9월 20일


지난 일요일과 오늘,

바다 건너 지인들과 줌을 통해 신나게 한국어로 떠들며 미팅한 후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육체는 네덜란드에 있지만 정신은 한국에 있구나.

네덜란드 바깥세상과는 등지고, 난 내가 만든 한국 버블에서 살고 있구나.

네덜란드로 온 후 집순이가 된 난,

아침에 미루를 학교에 데려다 줄 때와 운동할 때,

혹은 장 보러 슈퍼마켓 갈 때와 카밀과 산책할 때 외에는 거의 집에서 지낸다.

따로 작업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밖에서 만날 친구나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미루를 뺑뺑이로 학원 돌리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볕이 잘 드는 집에서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아르바이트 하고 책 읽고 커피 마시고 인터넷하고 카밀과 미루랑 놀고 등등 웬만한 걸 다 집에서 한다.

그러다 보니 다 한국어다.

한국어로 글을 쓰고,

한국 팟캐스트나 뉴스를 들으며 그림 그리고,

전자책으로 한국어책을 읽고,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를 보고,

네이버로 검색하고,

엄마와 친구들과 카톡으로 대화하며

SNS도 거의 한국어로 한다. (내 페북 담벼락을 보라.)

그래도 예전엔 미국 공영방송 NPR이나 BBC 뉴스 같은 영어 콘텐츠를 찾아 들었는데,

백그라운드로 두기엔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게 귀찮아서 슬슬 안 듣게 되고,미루와도 한국어로만 대화하니, (물론 미루가 영어로 대답해서 계속 한국어 하라고 지적해야 하지만)

영어를 쓸 때는 카밀과 대화할 때,

네덜란드어를 쓸 때는 장 볼 때와 네덜란드어 독학할 때밖에 없다.

이러다 보니 이건 뭐 배경만 네덜란드일 뿐이지 한국에서 사는 것과 다름없는데,

지난번 이 도시에서 아트 페어가 열리는 줄도 모르고 참가 기회를 놓친 것과

최근 몇 번의 줌 미팅 등을 통해 이 사실을 확실히 자각했고,

지금 난 큰 반성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픈 욕심은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떠날 거란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어서인지

자꾸 일의 베이스를 한국으로 두고

네덜란드 속으로 뛰어드는 걸 적극적으로 안 하고 있다는 반성.

프리랜서인지라 스스로 일을 벌여야 하는데

언어의 벽을 몇 번 경험한 후 기가 죽어서인지

이곳에서 네트워킹을 제대로 안/못 하고 있다는 반성.

‘주간 최승연’에서 마치 ‘50이 된 키 작은 동양인 아줌마가 어떻게 네덜란드에서 예술가로 살아남는가!’를

제대로 보여줄 것처럼 호방하게 썼는데, 그저 머쓱하다.

‘어머나, 제가 그렇게 썼다고요? 도대체 뭔 생각으로 그랬댜? 오호호호~~~’

반성한다.

나가야지!

움직여야지!

그리고 부딪쳐야지!

.

.

.

그런데...

.

.

.

춥다...

하루가 무섭게 급격히 떨어지는 이곳 온도.

현재 밖의 온도는 11도고 내일 밤은 6도로 떨어진다고...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나가야 해.

페북 덴 보스 그룹에서 같이 그림 그릴 사람도 찾아 보고,

방탄 아미 친구들과도 더 자주 만나자.

주말엔 큰 도시로 가서 전시회도 보고 공연도 보자.

그런데 나 아무래도 I 같아.

MBTI 검사에선 ENFP-A가 나오는데,

왜 이리 집이 좋지?

왜 이리 나가기가 귀찮지?

나 계속 여행하며 돌아다닌 사람 맞아?

‘활동가(ENFP)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외향적이고 솔직하며 개방적인 성격입니다. 이들은 활기차고 낙관적인 태도로 삶을 대하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돋보이곤 합니다. 그러나 신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즐거움만을 좇는 성격은 아니며,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일을 추구합니다.”

흠... 흠...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MBTI도 변하나?

요즘의 난 확실히 I인데.

아무튼,

요는!

밖으로 나가자는 것!

그 첫 번째 행동으로,

필라테스 수업을 끊거나 네덜란드어 선생님을 찾아야겠다.


안타까운 소식이 있다.

유니콘 린지가 위독하다.

자고 일어났더니 몸통 부위의 바람이 빠진 채로 베란다 난간에 걸쳐 있었다.

어젯밤까지 멀쩡했는데, 밤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바람이 세는 곳을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

하여, 다리는 통통하지만 몸은 추욱 쳐진 유니콘이 거실에 누워있다.

(다리 4개는 따로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한다.)

이 녀석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하며 무지 슬프다.

왜 난 갑자기 이 축 늘어진 유니콘에게 감정 이입하는가.

희한한 지점에서 호르몬이 요동친다.

참 가지가지 한다.


#일기 #이방인일기 #한국어 #버블 #걸어서세상속으로 #mb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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