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022년 9월 19일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19
2022년 9월 19일
젠장,
‘헤어질 결심’을 본 후 호기롭게 ‘일기 쓸 결심’을 했던 그 자세는 어디 가고, 어찌하여 시작부터 ‘젠장’으로 운을 띄우며 쫓겨 쓰는 일기가 되었나.
이 부담이 억울해서라도 9월 한 달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누룽지가 되든 꼭 채워야겠다고 ‘결심’한다.
어제 일기에 썼던 내용을 계속 이어가자면,
넷플릭스에 있는 리얼리티 쇼 ‘Love Is Blind 2 (한국 제목: 블라인드 러브 2)를 밤새워 정주행으로 본 후 인간 군상, 대화의 기법, 사랑의 본질 등 잡다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 시리즈의 기본 구조는 이렇다.
1. 각각 열댓 명의 남녀가 10일 정도 서로를 볼 수 없는 방에서
2. 돌아가며 대화로만 데이트를 한 후 이 사람이다 싶으면 청혼한다.
3. 합이 맞으면 그제야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가상 신혼여행을 간다.
4. 현실로 돌아와 3~4주 정도 동거와 상견례를 한 후
5. 결혼식 당일, 가족까지 다 초대한 상태에서 아이 두(I do)냐 아니냐를 결정한다.
6. 촬영 이후 출연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준다.
이야, 컨셉 보소! 역시 천조국!
이 시리즈의 주제는 ‘외적인 요소 없이 대화만으로 사랑이 가능한가?’이다.
즉 ‘순전히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줄 상대(someone who loves me as I am)’를 찾는 거다.
열흘간 방에서 상대를 바꿔가며 대화만 하는 특수한 상황은 사람을 지극히 편협하고 연약하게 만드는데, 순간의 상황에 폭포수처럼 밀려가는 게 인간인지라 그 분위기에 빠져 내리는 결정은 ‘제 눈에 안경’일 가능성이 너무 크다.
그렇기에 실험이 낳은 6쌍 커플이 결혼에 성공하느냐 아니냐보다는 (결국 두 커플만 결혼한다. 이건 스포랄 것도 없다.) 연인 사이에서 어떤 방어기제가 작동하는지 보는 게 재미있었는데,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출연자 한 명이 한 얘기가 귀에 박혔다.
‘와, 뭐든 막 꺼내네요. 피해자 코스프레 하려고요.’
뼈 있는 말이다.
즉, 문제가 있을 때 기필코 나쁜 사람이 안 되기 위해 여러 논리를 내세우며 자신을 피해자로 포지셔닝하려는 인간의 욕망(?), 즉, ‘다 너 때문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상대를 공격하려는 인간의 심리가 흥미로웠다.
표출되는 형태는 다양하지만 하나 같이 불안하고 중심 없이 자기 혐오적인 출연자들의 모습에 내 모습을 보는 게 너무 뜨끔해서 ‘그래, 원래 인간이 다 저렇지’란 위안을 얻었다.
또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줄 상대’를 찾는다지만 막상 ‘내 모습’이 무엇인지는 헷갈려 하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 나쁜 XX야!’ 가해자를 욕하지만 (한 사람쯤 훅 보내는 건 얼마나 쉬운가!) 그렇다고 피해자를 보호하지도 않는 아이러니함에, 교양을 내세우는 혹자는 쓰레기 프로그램이라고 깎아내릴 이 괴상한 리얼리티 쇼에서 얻는 의외의 심오함에 감탄했다.
신구 선생님이 튀어나와 ‘4주 후에 뵙겠습니다. 탕! 탕! 탕!’했다면 완벽했을 거다.
너무나 미국스러우면서도 범세계적인 기이한 시리즈에서 날 뒤돌아보다니,
이야~ 과연 천조국!
그래서 내린 결론은 어제 썼다시피 카밀에게 잘해야겠다는 것, 날 더 믿어야겠다는 것, 그리고 이건 결혼을 가장한 비혼 권장 프로그램이라는 것.
그런데 말이지... 왜 사람들은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일까?
이미 결혼한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다들 왜 그리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즌 3가 나오면 또 볼까?
재밌었지만 안 볼 것 같아.
그저께 본 프로그램으로 일기를 채웠는데 그렇다고 오늘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다.
시리즈를 본 여파가 있는 것인지 오늘 카밀의 모습이 유난히 사랑스러워서 책상에 앉아 열심히 돈 버는 그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여보, 외벌이 힘들죠? 나도 빨리 대박 낼게요… 그런데 어떻게? ㅠㅠ...)
그리하여, 모두가 꿈꾸는 그놈의 대박, 나도 한 번 내보려고 다시 색연필을 들고, 키보드를 두들기고, 네트워킹을 했다.
뜬금없이 무대가 그립다.
공연 첫날, 내 무대에 첫 조명이 비치기 직전, 무대감독이 내뱉는 큐 싸인의 그 초조함과 설렘이 그립다.
난 언제나 무대로 돌아가려나.
오늘 저녁은 카밀이 만들겠다고 하니, 오랜만에 네덜란드어 공부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