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아줌마 머리 속엔 뭐가 있을까 #22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022년 9월 22일

by Yellow Duck


이 아줌마 머리 속엔 뭐가 있을까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2


2022년 9월 22일


아침에 운동하러 호수로 가려고 길을 건너는데 갑자기 스쿠터가 튀어나왔다.

분명 양옆을 확인한 후 건넜는데 축지법이라도 쓴 건지 부다다당~ 훅 나타나는 스쿠터.

뭐지? 내가 한눈판 건가? 아닌데! 다 봤는데!

아무튼, 깜짝 놀라 쏘리 쏘리 하며 재빨리 반대편으로 뛰었다.

솔직히 내가 쏘리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반사적으로 나오다니, 이건 웬 피해의식인가?

‘어이쿠, 미안합니다. 제가 상쾌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당신의 즐거운 아침 길을 방해했군요. 그런데 좀 적당히 달리시지 뭐가 그리 급해서 속도를 내신답니까? 여고괴담 귀신처럼 쿵! 쿵! 쿵! 올 정도로 중차대한 일이라도...’ 라고 말하기보다는 아이고 깜짝이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데, 얼레? 적반하장으로 내게 꽥꽥 소리 지르는 이 양반을 보라.

네덜란드어고 또 스쿠터 소리 때문에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못 알아들었으나 분명 욕이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충분히 인종차별적인 말도 할 것 같았다.

(추측이다. 짧은 순간의 판단에 의한 내 편견일 뿐, 정확한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뭐 저런 또라이가 있나, 그냥 절레절레 고개만 흔들고 갈 길을 갔겠지만,

오늘 아침은 귀신이라도 붙은 건지 갑자기 전투력이 드레곤볼 베지타 이상으로 상승하여,

온몸으로 분노를 화아악 표출하며 (베지타를 상상하라) 그를 향해 질세라 소리 질렀다.

- FXXX OFF, YOU IDIOTTTTTT!!!!!!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로 뛰기 시작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도 내가 뭔 짓을 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냅다 뛰었는데,

뛰면 뛸수록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와 프라이드가 스믈스믈 퍼졌고,

내 입은 조커의 입처럼 큭큭큭큭 양쪽으로 벌어졌다.

으흐흐흐 아이고 통쾌해! FXXX OFF라니! 아침부터 내뱉는 이 육두문자의 상큼함이여!

이 양반아, 더한 말도 할 수 있었어! Idiot은 욕도 아니지! 앞으로 조심해!

그런데 나도 참 많이 컸구나.

길 한복판에서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이 그렇게 소리 지르다니.

누구 눈엔 쬐끄만 동양 여자가 새끼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걸 수도 있겠지만,

이봐, 부탁하건대, 날 건드리지 말라고.

네덜란드 소도시 생활 2년이면 전투력이 만땅 된다.

거친 도시/나라에선 얼마나 걸릴까? 한 달? 일주일? 아니, 하루?

뉴욕에서의 내 전투력은 몇이었지? 기억이 안 나네.

어느 때 보다 잘 달린 청량한 아침이었다.


스쿠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여기 사람들 진짜 빨리 달린다.

여기서 빨리 달리는 대상은 자전거와 스쿠터다.

알다시피 네덜란드는 전 국민이 자전거를 타는데,

워낙 어렸을 때부터 몸으로 자전거 타는 게 채화되어 있다 보니

다들 도사처럼 쉽게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자전거 도로에서 심하게 쌩쌩 달린다.

살짝 넋 놓았다간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나도 참 못 말리는 게, 모두가 자전거를 타는 이 나라에서

혼자 독야청청 자전거를 거부하고 걷기를 고집하고 있다.

작은 도시인지라 웬만한 곳은 다 십몇 분 정도면 자전거로 갈 수 있는데도

운동한다는 핑계를 대며 굳이 30분 넘게 걸어가는 것이다.

타면 오른쪽 무릎 바깥 부분이 아플까 봐 피하는 것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겁쟁이라서 그렇다.

정말이지 난 자전거 타는 게 너무 무섭다.

내 키에 맞는 자전거를 찾는 게 어렵기도 하고 (아동용 말고)

페달을 너끈히 밟기엔 숏다리인 내 다리가 비극이기도 하고

처음 나아갈 때 중심을 못 잡아 휘청이는 게 위험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쌩쌩 달리는 자전거가 뒤에서 비키라며 따릉거리기라도 하면... 어휴, 생각하기도 싫어.

그러나 무엇보다도 절망일 때는

낑낑대는 내 옆을 자기 몸만 한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지나가는 네덜란드 꼬마들을 볼 때.

그래, 잘났구나 너희들.

이 나라에서 제일 날 자괴감에 들게 하는 건,

외국인인 것도 언어도 아닌, 바로 자전거다.

과연 난 자전거 포비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자전거와 더불어 자동차 운전도 거부하는 난 시대에 뒤떨어진 고집불통인 걸까?

누구는 일부러 걸으려고 순례길에서 고생을 사서 하는데

제발 걸으려는 내 의지를 꺾지 말아다오.

그런데 미루가 날 닮았는지 미루도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치즈도 안 좋아하고 자전거도 안 좋아하고,

아니, 이 녀석은 반은 네덜란드인인데 왜 이러지?

한국 패치가 너무 심해.

미루야, 적당히 균형 좀 잡자.


아무튼,

Fxxx off 따위야 껌으로 말할 수 있는 나는야 천하무적 코리안 아줌마!

(물론 상황 봐 가며 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일기 #이방인일기 #자전거 #욕 #욕쟁이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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