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022년 9월 23일
이 아줌마 머리 속엔 뭐가 있을까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3
2022년 9월 23일
일기를 쓰려고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쓸 게 없다.
오늘 참 별일 없이 밋밋했거든.
‘유럽 사는 태평한 백수 아줌마’의 허울을 성실하게 이행했거든.
속에서 용암처럼 요동치는 무언가를 달래며.
가끔은 이 용암의 실체가 허영에 찬 내 욕심은 아닐까 자문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 난 지독한 나르시스트 같다.
‘헤어질 결심’에 자극받아 글쓰기 습관을 기르기 위해 시작한 일기가
그냥 내 노트북에만 쓰면 될 걸 굳이 SNS에 올리는 바람에
쪽팔리기 싫어서 헛소리라도 쓰는 족쇄가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뭐라도 늘어놓는다.
후에 이 족쇄가 꽃목걸이로 피어나길.
어제 Fxxx off의 쾌감이 아직도 혀 언저리에 남아있는데,
지극히 좁은 내 생활 반경 안에서 욕을 쓸 일도, 흥분할 일도 없어서
일종의 일탈의 심정으로 이 욕을 즐기는 것 같다.
가끔 만약 길거리에서 인종차별을 당하면
어떻게 대처할까 시뮬레이션을 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욕쟁이 할머니를 능가하는 욕을
드랍더빗! 속사포 랩으로 쏘아대는 나를 상상하지만
막상 당하면 과연 위풍도 당당하게 마이크 드랍을 날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릴 때 ‘권법소년’ 만화책을 보며 나도 주인공 한주먹의 엄마처럼
무술의 고단자가 되어 위기의 상황에서
.
.
.
안 되겠다.
못 쓰겠다.
위의 문장에서 막혀서 멍하니 20분을 있었다.
안 될 땐 빠르게 포기.
뭐 이럴 때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심오한 사유라도 나올 것처럼 ‘인종차별’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투하하더니
이렇게 무책임하게 도망간다.
속으로 ‘스웩 쩐다’라고 생각하는 난, 역시 나르시스트.
역시나, 뭐 이럴 때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지독히 밋밋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