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아줌마 머리 속엔 뭐가 있을까 #24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022년 9월 24일

by Yellow Duck

이 아줌마 머리 속엔 뭐가 있을까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4


2022년 9월 24일


하루 지나서야 생각난다.

그래, 어제 그림 하나를 완성했지.

그리고 보란 듯이 SNS에 올렸지.

그렇다면 ‘지독히 밋밋’하진 않았군.

곰곰이 생각하면 뭐든 있는 법이니 앞으로 ‘지독히 밋밋한 날’은 없는 걸로 하자.

완성한 그림은 어떻게 하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대답한다.

그림들을 액자에 넣어야 하는데 괜찮은 액자는 너무 비싸서

그냥 파일에 넣거나 종이 채로 벽에 붙여 놓는데 거기에 대해 카밀이 불만이 많다.

그림 상하게 저리 붙여 놓으면 어떡하냐고.

어찌 된 게 그림 그린 당사자보다 더 난리를 치는지.

그러면서 중고 샵에 있는 값싼 액자들을 막 사 오는데,

솔직히 그 액자들의 퀄리티가 별로라서 넣어도 태가 안 난다.

그래도 보관의 차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완성된 그림에 대해 더 이상의 조치를 안 취하는 내 태도에 대해서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글을 대할 때와 그림을 대할 때의 내 태도는 꽤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림은 내가 어떤 결과물을 낼지 정확히 예상할 수 있다.

어떤 재료로 얼마만큼 시간을 들여 어떤 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지 안다.

즉, 내 능력치를 아는 것이다.

난 인물화 대신 풍경화에 강하고,

루즈한 스타일보다 촘촘한 스타일에 강하고,

물감보다 수채 색연필, 마카, 펜에 강하며

휘리릭 일필휘지로 그리기보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오래 그리기에 강하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의 난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린다.

남들이 뭐라고 평가하건 상관없이 난 내 그림에 대체로 만족한다.

(어차피 다들 잘 그렸다고 인정할 것이기에 걱정 안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휴, 재수 뿡. 이런 나르시스트 같으니라고)

반면 글은 정반대다.

내 글의 방향이 어디로 갈지 당최 예상할 수가 없다.

글의 퀄리티에 대해서도 장담할 수가 없다.

쓰고 싶은 글은 있지만 어떻게 쓸지는 안개 속에서 한참을 헤맨다.

그림은 시키지 않아도 내 손이 알아서 척척 움직이지만

글은 전혀 그렇지 않고 이른바 ‘그분’이 내려오길 기다려야 한다.

글을 쓸 때 난 꽤 초조하고 예민하며

걸레 짜듯 뇌를 쥐어짜 겨우 단어 하나를 내놓는다.

그러니 글 쓸 때 편안할 리 없고 만족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기를 쓰고 쓰려고 하는지는...

Well, I don’t know.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

완성된 그림을 무심히 쌓아 놓는 내 행위는 생산성 강박에 대한 자위일지도 모르겠다.

‘봤지? 나 이런 사람이야’ 내 재주를 증명하고 그걸로 만족하는 자위.

글 하나를 완성했을 때의 감정은 매우 복잡한데

(어머, 내가 이런 문장을 썼다고? 이런 천재! VS 왜 난 이렇게밖에 못 쓰지? 이런 바보)

완성의 희열은 글을 쓸 때가 더 강하다.

일종의 정복욕이랄까?

모자란 재주지만 그래도 이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 제출?

하아... 쓰고 보니 변태네 변태.

괜찮아. 인간은 모두 변태야!

아, 물론!

당연히 전시회 열고 싶다. 그걸 왜 마다해.

내 그림이 작고 (크게 그리고 싶어도 그릴만한 스튜디오가 없고)

수채 색연필로 그린 풍경화인지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구분되어

갤러리에서 전시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칫, 뭘 모르고 하는 소리! 실제로 보시라.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아무튼, 결론은 제대로 액자를 맞춰야 한다는 거.

언젠가 크게 투자해서 제대로 액자를 맞출 기회가 있기를.

물론, 그 기회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그림들이 불쌍해진다.

어디 후원하실 분 안 계실까요?

결국 기승전홍보. ㅎㅎㅎ

아, 그리고 어제 아홉 번째 거절 메일을 받았다.

역시 글은 안 되는 걸까?


오늘부터 카밀이 일주일간 집에 없다.

네덜란드 북쪽, 프리슬란드의 작은 마을에 있는 캠핑장에서

일주일간 작가 한 명에게 레지던시 비스무리한 형태로 공간을 빌려주는데,

거기에서 글을 쓰겠다며 간 것이다.

카밀 없는 아파트가 얼마나 조용할지, 일주일간 꽤 허전할 것 같다.

치통이 그나마 덜하다고 하니 (그저께 또 치료받고 왔음)

집중해서 잘 쓰고 오기를.

하아... 일주일간 미루와 어떻게 놀아주나... 놀아주는 건 카밀 담당인데...


#일기 #이방인일기 #그림 #글 #창작의괴로움 #아는사람어디없소 #왜사서고생 #나도몰라묻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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