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시내의 ‘힙스터’ 커피숍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록다운이 풀린 후 처음으로 밖에서 글을 쓰는데, 이렇게 주변의 소음을 벗 삼아 글을 쓰자니 무슨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된 것 같다. 오랜만에 카페에 나온 이유는 언어 교환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다. 한 시간 후면 친구가 온다. 언어 교환은 당연히 한국어와 네덜란드어고 오늘이 첫 만남이다.
참 나… 네덜란드어라니.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어, 스페인어도 아닌 네덜란드어라니! 내 인생에서 언어는 한국어랑 영어면 될 줄 알았는데, 어쩌다! 여러분, 네덜란드어 들어보신 적 있나요? 게르만 언어 중 하나인데, 독어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영어도 아닌 것이, 목 긁는 소리가 나고 문법이 헷갈리는 꽤 어려운 언어랍니다. 전 세계 78억 인구 중 약 2천5백만 명 정도만이 네덜란드, 벨기에, 수리남, 아루바섬 등에서 쓰는, 지극히 지엽적인 언어지요. 제국주의 시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언어인 아프리칸(Afrikan)을 낳기도 했습니다.
고백한다. 내 귀엔 네덜란드어가 아름답지 않다. ‘듣는 네덜란드 사람 기분 나쁘게…’라고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귀에는 그렇다. 만약 네덜란드어가 매력적이었다면 공부하기가 더 쉬웠을까? 어쨌든 난 네덜란드어를 배워야 한다. 의무는 아니다. 파트너/배우자 비자를 취득한 외국인은 2년 안에 의무적으로 언어 시험을 봐야 하지만 부모 비자를 취득한 난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과 단절한 히키코모리도 아니고, 네덜란드가 주변 국가에 비해 영어가 잘 통용되는 나라라지만 장도 봐야 하고, 학교 선생님과 얘기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최소 아이와 아빠가 지들끼리 뭐라고 쑥덕이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현지어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만드는 차이는 판문점에서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남북 병사의 관계만큼 크다. 의무가 아니니 네덜란드어 공부는 순전히 내 의지에 달린 일이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네덜란드어 수업에 간 적이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지역마다 외국인/이민자를 위해 언어 수업을 무료로 제공한다. 어느 날 아침, 미루를 등교시킨 후 쭈뼛쭈뼛 기관을 찾아갔다. 건물 밖은 조용했으나 문을 열자 꽤 많은 사람이 북적거려서 적잖이 놀랐다. 청년부터 어르신까지,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레벨에 따라 그룹에 배치됐다. 난 당연히 기초반에 배치됐고 머쓱하게 앉아 있는 사이, 4명이 책상을 채웠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 선생님이 학생들을 반겼다. 난 어설픈 네덜란드어로 손짓, 발짓 자기소개를 했다.
- (검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익!(ik, 나) 꼬레안! (Koreaan, 한국 사람) 유 노 강남 스타일? (얼마나 유치한가!) 익! 히어!(hier, 여기), 원!(woon, 살다), 미어 단 에인 야르!(meer dan een jaar, 1년 이상)
왜 이리 단어 하나하나에 느낌표가 붙는지. 소개를 들어본 결과 나를 포함 책상에 앉는 5명의 구성은 이랬다. 터키 아저씨, 인도네시아 아줌마, 무슬림 아줌마(국적은 모름), 한국 아줌마(나), 그리고 네덜란드 할머니(선생님).
선생님은 A부터 Z까지 알파벳을 노트에 쓰라고 했다. 알파벳? 기분이 묘했다. ㄱ, ㄴ, ㄷ을 처음 배우는 유치원생도 아니고, 최종 학력이 대학원인데 에이비씨디라니. 하지만 내게 석사 학위가 있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알파벳 발음이 영어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에 기초반에서 알파벳을 배우는 건 당연한 거다. (에이, 비, 씨, 디, 이, 에프, 쥐가 아닌 아, 베이, 쎄이, 데이, 에이, 에프, 혜이…) 학생들은 진지하게 노트에 꾹꾹 눌러 24개의 알파벳을 썼다. 터키 아저씨는 여기서 22년을 사셨다면서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자꾸 옆자리의 노트를 훔쳐봤다. 난 제대로 못 읽고 (g가 ‘혜이’고, h는 ‘하’고, j는 ‘예이’라니!) 아저씨는 제대로 못 쓰고. 이렇게 국적, 나이, 성별, 학력이 모두 다른 4명의 어른이 네덜란드어 앞에서 유치원생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평등했다. 이민자/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알파벳의 발음을 교정해 주신 선생님은 갑자기 레벨을 훌쩍 뛰어 동사 변형을 설명했다. (잉? 알파벳 발음에서 갑자기 동사 변형? 체계가… 있는 거야?)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웬만한 유럽어에는 그놈의 빌어먹을 ‘동사 변형’이라는 게 있다. 주어에 따라 동사의 형태도 달라지는데, 영어처럼 ‘삼인칭 단수(he/she/it)에는 동사 끝에 S 붙이고 땡!’이 아닌 인칭과 단수, 복수에 따라 모두 변한다. 여기서 끝나면 말을 안 해, 불규칙 동사는 물론이고 과거형, 미래형 등 시제에 따라서도 다 변한다! 여기에 이르면 과장 안 보태고 헐크가 되어 책을 찢어버리고 싶다. 팁은 없다. 그냥 닥치고 외울 뿐.
- 자, ‘보다’란 동사 zien을 봅시다. Zien은 이렇게 변해요. Ik zie, Je ziet, Hij ziet, Zij ziet, Wij zien, Ze zien… (익 지, 여 짙, 헤이 짙, 제이 짙, 웨이 지인, 즈 지인…)
선생님은 현재형 변형을 차례로 설명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 혹시 zie의 과거형이 뭔지 알아요? (잉? 현재형 배우기도 바쁜데 갑자기 과거형? 체계가… 있는 거야?)
선생님은 혹시나 하는 눈으로 학생들을 살폈다. 당연히 침묵.
- zag(작)이에요.
- zag요?
- 예. zag요.
- zag?? zag??? zag????
나를 포함, 한 사람씩 돌아가며 zag?을 반복했다.
- 왜요? 어떻게 현재가 zie인데 zag로 변해요?
- 원래 그래요. 규칙 동사에는 과거형을 만들 때 규칙이 있지만 zien은 불규칙 동사예요. 불규칙 동사에는 이유 같은 거 없어요. (잉? 규칙 동사 배우기도 바쁜데 갑자기 불규칙 동사? 체계가… 있는 거야?)
1초, 2초, 3초… 순간의 정적 후 우리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이래?’란 학생의 생각과 ‘내 말이, 나도 모르겠네’란 선생님의 생각이 동시에 교차하는 걸 모두가 느꼈기 때문이었다.
- 이런 동사가 수도 없이 많으니 앞으로 각오하세요!
선생님은 격려도, 그렇다고 안타까움도 아닌, 농담에 가까운 투로 경고했다. 국적, 언어, 나이, 성별, 학력이 모두 다른 성인 유치원생 4명이 같은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어이없는 웃음을 나눴다. 결핍이 주는 응집력이란 이런 것일까. 그 결핍이 뭔지 알기에 서로를 이해하는 정겨움이 반가웠다. ‘언어 기초반’이란 곳은 그런 곳인가 보다. 배경을 불문하고 모든 이를 스타트 라인에 세우지만 달리는 대신 서로 손 잡고 가게 하는 곳. 하지만 이 수업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언어 기초반’의 정겨움은 좋았지만 내게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게 언어 교환이다. 훨씬 개인적이고 나아가 친구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
다시 이 글의 제목을 반복하며 징징거린다. 도대체 난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나이에 네덜란드어를 공부해야 한단 말인가? 부질없지만 그래도 징징거리면 그나마 속이 후련하다. 징징 글을 마쳐야겠다. 방금 창문 너머로 언어 교환 친구처럼 보이는 한 여성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첫 만남이 어떻게 진행될지 사뭇 떨리는데, 네덜란드어는 둘째치고 내 한국어나 신경 써야겠다. 대화의 주제는 물론 방탄소년단이 될 것이다. 방탄소년단 때문에 이 친구를 알게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