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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Oct 10. 2022

난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나이에 네덜란드어를..

'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난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나이에 네덜란드어를 공부하는가!>

 

  시내의 힙스터’ 커피숍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록다운이 풀린 후 처음으로 밖에서 글을 쓰는데이렇게 주변의 소음을 벗 삼아 글을 쓰자니 무슨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된 것 같다오랜만에 카페에 나온 이유는 언어 교환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다한 시간 후면 친구가 온다언어 교환은 당연히 한국어와 네덜란드어고 오늘이 첫 만남이다.

 

  참 나… 네덜란드어라니일본어중국어프랑스어독어스페인어도 아닌 네덜란드어라니내 인생에서 언어는 한국어랑 영어면 될 줄 알았는데어쩌다여러분네덜란드어 들어보신 적 있나요게르만 언어 중 하나인데독어도 아닌 것이그렇다고 영어도 아닌 것이목 긁는 소리가 나고 문법이 헷갈리는 꽤 어려운 언어랍니다전 세계 78억 인구 중 약 25백만 명 정도만이 네덜란드벨기에수리남아루바섬 등에서 쓰는지극히 지엽적인 언어지요제국주의 시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언어인 아프리칸(Afrikan)을 낳기도 했습니다


  고백한다내 귀엔 네덜란드어가 아름답지 않다. ‘듣는 네덜란드 사람 기분 나쁘게…’라고 하겠지만안타깝게도 내 귀에는 그렇다만약 네덜란드어가 매력적이었다면 공부하기가 더 쉬웠을까어쨌든 난 네덜란드어를 배워야 한다의무는 아니다파트너/배우자 비자를 취득한 외국인은 2년 안에 의무적으로 언어 시험을 봐야 하지만 부모 비자를 취득한 난 해당하지 않는다하지만 세상과 단절한 히키코모리도 아니고네덜란드가 주변 국가에 비해 영어가 잘 통용되는 나라라지만 장도 봐야 하고학교 선생님과 얘기도 해야 하고무엇보다 최소 아이와 아빠가 지들끼리 뭐라고 쑥덕이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현지어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만드는 차이는 판문점에서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남북 병사의 관계만큼 크다의무가 아니니 네덜란드어 공부는 순전히 내 의지에 달린 일이다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네덜란드어 수업에 간 적이 있다네덜란드 정부는 지역마다 외국인/이민자를 위해 언어 수업을 무료로 제공한다어느 날 아침미루를 등교시킨 후 쭈뼛쭈뼛 기관을 찾아갔다건물 밖은 조용했으나 문을 열자 꽤 많은 사람이 북적거려서 적잖이 놀랐다청년부터 어르신까지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레벨에 따라 그룹에 배치됐다난 당연히 기초반에 배치됐고 머쓱하게 앉아 있는 사이, 4명이 책상을 채웠다그리고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 선생님이 학생들을 반겼다난 어설픈 네덜란드어로 손짓발짓 자기소개를 했다

  - (검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ik, 꼬레안! (Koreaan, 한국 사람유 노 강남 스타일? (얼마나 유치한가!) 히어!(hier, 여기), !(woon, 살다), 미어 단 에인 야르!(meer dan een jaar, 1년 이상)

  왜 이리 단어 하나하나에 느낌표가 붙는지소개를 들어본 결과 나를 포함 책상에 앉는 5명의 구성은 이랬다터키 아저씨인도네시아 아줌마무슬림 아줌마(국적은 모름), 한국 아줌마(), 그리고 네덜란드 할머니(선생님). 

  선생님은 A부터 Z까지 알파벳을 노트에 쓰라고 했다알파벳기분이 묘했다ㄷ을 처음 배우는 유치원생도 아니고최종 학력이 대학원인데 에이비씨디라니하지만 내게 석사 학위가 있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랴알파벳 발음이 영어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에 기초반에서 알파벳을 배우는 건 당연한 거다. (에이에프쥐가 아닌 아베이쎄이데이에이에프혜이…) 학생들은 진지하게 노트에 꾹꾹 눌러 24개의 알파벳을 썼다터키 아저씨는 여기서 22년을 사셨다면서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자꾸 옆자리의 노트를 훔쳐봤다난 제대로 못 읽고 (g가 혜이, h는 , j는 예이라니!) 아저씨는 제대로 못 쓰고이렇게 국적나이성별학력이 모두 다른 4명의 어른이 네덜란드어 앞에서 유치원생이 되었다그 자리에서 우리는 평등했다이민자/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알파벳의 발음을 교정해 주신 선생님은 갑자기 레벨을 훌쩍 뛰어 동사 변형을 설명했다. (알파벳 발음에서 갑자기 동사 변형체계가… 있는 거야?) 프랑스어스페인어 등 웬만한 유럽어에는 그놈의 빌어먹을 동사 변형이라는 게 있다주어에 따라 동사의 형태도 달라지는데영어처럼 삼인칭 단수(he/she/it)에는 동사 끝에 붙이고 땡!’이 아닌 인칭과 단수복수에 따라 모두 변한다여기서 끝나면 말을 안 해불규칙 동사는 물론이고 과거형미래형 등 시제에 따라서도 다 변한다여기에 이르면 과장 안 보태고 헐크가 되어 책을 찢어버리고 싶다팁은 없다그냥 닥치고 외울 뿐

  - 자, ‘보다’란 동사 zien을 봅시다. Zien은 이렇게 변해요. Ik zie, Je ziet, Hij ziet, Zij ziet, Wij zien, Ze zien… (익 지여 짙헤이 짙제이 짙웨이 지인즈 지인…) 

  선생님은 현재형 변형을 차례로 설명했다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 혹시 zie의 과거형이 뭔지 알아요? (현재형 배우기도 바쁜데 갑자기 과거형체계가… 있는 거야?) 

선생님은 혹시나 하는 눈으로 학생들을 살폈다당연히 침묵

  - zag()이에요

  - zag?

  - . zag

  - zag?? zag??? zag????

  나를 포함한 사람씩 돌아가며 zag?을 반복했다

  - 왜요어떻게 현재가 zie인데 zag로 변해요?

  - 원래 그래요규칙 동사에는 과거형을 만들 때 규칙이 있지만 zien은 불규칙 동사예요불규칙 동사에는 이유 같은 거 없어요. (규칙 동사 배우기도 바쁜데 갑자기 불규칙 동사체계가… 있는 거야?)  

  1, 2, 3… 순간의 정적 후 우리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이래?’란 학생의 생각과 내 말이나도 모르겠네란 선생님의 생각이 동시에 교차하는 걸 모두가 느꼈기 때문이었다

  - 이런 동사가 수도 없이 많으니 앞으로 각오하세요!

  선생님은 격려도그렇다고 안타까움도 아닌농담에 가까운 투로 경고했다국적언어나이성별학력이 모두 다른 성인 유치원생 4명이 같은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어이없는 웃음을 나눴다결핍이 주는 응집력이란 이런 것일까그 결핍이 뭔지 알기에 서로를 이해하는 정겨움이 반가웠다. ‘언어 기초반이란 곳은 그런 곳인가 보다배경을 불문하고 모든 이를 스타트 라인에 세우지만 달리는 대신 서로 손 잡고 가게 하는 곳. 하지만 이 수업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언어 기초반의 정겨움은 좋았지만 내게는 맞지 않았다그래서 찾은 게 언어 교환이다훨씬 개인적이고 나아가 친구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

 

  다시 이 글의 제목을 반복하며 징징거린다도대체 난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나이에 네덜란드어를 공부해야 한단 말인가부질없지만 그래도 징징거리면 그나마 속이 후련하다징징 글을 마쳐야겠다방금 창문 너머로 언어 교환 친구처럼 보이는 한 여성이 지나갔기 때문이다첫 만남이 어떻게 진행될지 사뭇 떨리는데네덜란드어는 둘째치고 내 한국어나 신경 써야겠다대화의 주제는 물론 방탄소년단이 될 것이다방탄소년단 때문에 이 친구를 알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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