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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Oct 07. 2022

누가 본다고 마스크를 쓰라고 지랄이야

'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달빛은 강했고 구름의 흐름은 적당했다. 카밀은 소파에 누워 볼만 한 넷플릭스 영화를 찾고 있었고 미루는 방에서 키보드를 치며 놀고 있었다. 승연은 잠시 코믹 캐럴을 부르는 심형래처럼 고민했다. 달릴까? 마알~까? 고민 시간은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승연은 재빨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카밀에게 미루 좀 재워달라고 한 마디 툭 던지고는 밖으로 나왔다. 섭씨 32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태국이지만 달리기 좋은 공기였다. 승연은 기지개를 쭈욱 켜고 발목을 돌렸다. 그리고 마스크의 고무줄을 양 귀에 걸었다. 자, 가자, 나이트 러닝의 시간이다.

 

  때는 2020년 6월 중순, 우기의 절정을 지나는 끄라비였다. 언제 비가 내릴지 몰라 계획을 세우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좀 살다 보니 약간의 패턴이 보였다. 오후 4시엔 꼭 비가 내렸는데 낮에 달궈진 지열을 소나기가 식히기 때문에 5시쯤 뛰는 게 제일 좋았지만 그 시각에 뛰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승연은 밤을 택했다. 안전한 동네였고 상대적으로 비가 덜 내렸다. 코로나 때문에 생긴 통금 시간만(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피하면 될 일이었다.

  승연은 뛰기 전 워밍업으로 스트레칭을 하며 큰길까지 가는 골목으로 우회전했다. 그러자 가로등 밑에서 번쩍이는 여러 눈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 골목엔 항상 떠돌이 개들이 있었다. 처음엔 한 마리였지만 슬슬 늘어나더니 어느덧 9마리의 개가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해코지는 없더라도 다 같이 달려들어 짖으면 꽤 위협적이어서 이 길을 지날 때마다 곤욕이었다. 으르르 거리는 개들 사이로 승연은 눈을 내리 깐 채 최대한 조용히 걸었다. 마치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의 지목을 받아 아이들의 눈총을 받으며 교단 앞으로 나가는 학생이 된 기분이랄까?  

  - 부다다다다당!

  갑자기 뒤에서 번쩍 헤드라이트 불이 들어오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갔다. 개들은 이빨을 드러낸 채 컹컹 짖으며 흩어졌고 그 틈을 타 승연은 전속력으로 큰길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항상 뛰는 코스인 오른쪽으로 꺾었다. 딱 1시간 걸릴 코스였다.  

 

  청명한 밤이었다. 낮에 나왔다면 너무 더워 뛰다가 돌아갔을 것이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야자수 냄새를 맡으며 열대 숲을 뛰는 기분. 이게 바로 태국의 맛. 마스크를 쓰고 뛰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좋구나. 천천히 뛰던 승연이 속도를 내려고 자세를 고치려던 찰나, 한 검은 그림자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 웬일이지? 이 시간에 뛰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낯익은 뒷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옆집 프랑스인 가족의 친구였다. 무에타이 용품 무역업을 하는 옆집 남자는 무에타이 유권자다. 그래서 종종  친구가 찾아와 옆집 남자와 무에타이 훈련을 하곤 했다.   마주쳤으면 인사라도  법한데,  남자 모두 먼저 인사해도 모른 척해서 승연은 항상 ‘재수 없는 놈들!’하고 삐죽거렸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앞에서 뛰고 있다니! 별로 달갑지 않은 사람의 등장에 조금  느꼈던 국의 맛이 반감되어버렸다.

  그런데 어? 이 남자, 마스크를 안 썼다! 현재 태국은 마스크 착용이 의무이고 안 쓰면 벌금을 무는데… 벌금이 시행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저 남자가 모를 수도 있다. 무시하고 지나갈까? 말을 해줄까?

  - 저기요… 규칙 바뀐 거 들었어요? 마스크 안 쓰면 벌금 5000바트래요. (한화 약 15만 원)

  승연의 오지랖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앞만 보고 달렸다. 쳐다보지도 않았다.

  - (뭐지? 내 얘기 들은 건가? 또 생까는 거야?)

  투명 인간 취급하며 무심히 달리는 그의 반응에 승연은 주춤하며 속도를 늦췄다. 남자는 힐끗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곁눈질로 승연을 봤다. 그리고 낮게 툭 뱉는 한 마디.  

  - 이 밤중에 누가 본다고 마스크를 쓰라고 지랄이야.

  그러더니 갑자기 파바박 스피드를 내 달리기 시작했다. 영어로 말했으니 분명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어이없게 뒤통수를 맞는 승연은 그대로 얼어 뛰는 걸 멈췄다. 귓속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 지랄이야... 지랄이야... 지랄이야... 승연은 두 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숨을 골랐다. 들숨 날숨 들썩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승연을 두고 프랑스 남자는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 뭐야, 저 새끼, 나 들으라는 거야? 이러니까 파랑이 단체로 욕을 먹지! 에이, 재수 없어!

  태국어로 ‘파랑(Farang)’은 서양인이란 뜻이다. 가뜩이나 예전부터 일부 파랑에 의해 쌓인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다른 외국인들까지도 싸잡아 욕을 먹는 상황이었다. (즉 따뜻한 날씨, 저렴한 물가, 맛있는 음식 등 태국의 장점만 취할 뿐 태국을 알려고 노력하거나 존중하기는커녕 오히려 격하하고, 나이 든 백인 남자는 노후를 위해 돈을 내세우며 젊은 태국 여자를 찾으려고 한다는 이미지) 해변에서 떼거리로 맥주 파티를 열다가 경찰에 연행되거나 마스크를 착용 안 하는 경우는 십중팔구 백인 파랑이었다. 오죽하면 정부 고위 간부의 입에서 태국의 코로나는 순전히 마스크를 안 쓰는 파랑 때문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 누구는 바보라서 마스크 쓰고 뛰는 줄 아나… 하여간 유럽 놈들은 지밖에 몰라!  

  달릴 기분을 잃은 승연은 투덜투덜 유럽인에 대한 지나친 일반화를 늘어놓았다. 유럽의 코로나 대처 뉴스를 볼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하던 차였다. 해외 교민 게시판에 올라온 성토의 글에서 달라도 너무 다른 그들의 태도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 살면 최소 이곳 규칙을 따라줘야 하지 않나? 유럽의 개인주의, 어디까지 가봤니?를 생각하며 승연은 나이트 러닝을 나이트 워킹으로 바꿨다.      

 

  고요했다. 사각사각 흙길을 밟는 승연의 걸음 소리만 들렸다. 구름이 달을 가려 어두워졌고 공기는 더 선선해졌다. 순간 나무 태우는 냄새가 마스크를 비집고 들어와 승연의 코를 타고 목구멍으로 침투했다. 숨이 턱 막혔다. 젠장, 이 밤중에 누가 나무를... 승연은 버티다가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리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몸 안의 연기를 밖으로 내보내려고 콜록거렸다. 마스크는 입김으로 축축했고 입 주변에는 땀이 가득 차서 송골송골 기포가 맺혔다. 승연은 걷는 걸 멈추고 마른세수로 두 번 얼굴을 크게 쓸었다. 갑자기 프랑스 남자의 말이 생각났다.

  - 이 밤중에 누가 본다고 마스크를 쓰라고 지랄이야.

  승연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야자수와 흙과 어둠만이 승연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게, 이 밤중에 누가 본다고, 숨쉬기가 이렇게 힘든데 마스크를 쓰며 뛰지? 승연은 두 귀에 걸린 고무줄을 내리고 마스크를 손에 쥐었다. 비 냄새가 났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이쿠, 비가 오겠구나. 조금만 더 가면 구멍가게가 있는데, 그 밑으로 피하자. 승연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 같은 구멍가게로 뛰었다. 구멍가게 아저씨는 마스크를 쓰고 계산대에 다리를 올린 채 의자에 앉아 키득거리며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승연은 다시 마스크를 쓰고 냉장고에서 환타 오렌지 맛 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계산 중에도 아저씨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승연은 가게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았다. 후두둑 몇 줄기가 내리더니 이내 쏴아아아 소나기가 내렸다. 딱! 환타 캔을 땄다.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리고 홀짝홀짝 마시다가 이내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또 프랑스 남자 말이 생각났다.

  - 누가 본다고 마스크를 쓰라고 지랄이야.

  안 보긴 누가 안 봐. 아저씨가 보잖아. 하지만 아저씨는 여전히 스크린 안으로 들어갈세라 휴대폰에 집중하고 있었다. 승연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봤다.   

  - 하아… 여전히 기분 나쁘네… 내가 무슨 틀린 말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 승연은 한 번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왜 마스크를 써야 하지? 물론 코로나 감염과 확산을 막기 위해 의사와 과학자들이 마스크 쓰는 것을 권고했으니 쓰는 거지만, 이렇게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까지 마스크를 써야 하는 것에 대해 승연은 단 한 번도 반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히 기계적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갑자기 자존심이 상했다.  

  - 내가 진짜 지랄하는 건가…    

 

  승연이 아오낭에서 산 지도 4개월이 지났다. 언제 이 코로나 시국이 진정될지, 언제 다시 공항이 열릴지, 언제 태국 정부가 다시 외국인 비자를 작동시킬지 알 길이 없었다.

  - 이러다 그냥 여기서 눌러앉는 거 아냐?

  그렇다면 승연과 카밀, 미루는 친구의 말마따나 파라다이스에서 살게 되는 걸까? 승연은 이 모든 게 스티븐 킹의 소설 같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평화롭지만 언제 어디서 괴물이나 악마가 나올지 모르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그의 소설 말이다. 갑자기 승연은 이 소설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너무 궁금해서 페이지를 팍팍 넘겨 끝까지 읽고 싶어졌다. 더 굵어진 비가 세차게 구멍가게의 철판 지붕을 때렸다. 다다다다다다, 파바바바바박, 우두두두두두, 쿠구구구구궁… 마치 9마리의 떠돌이 개가 승연의 머리 위에서 날카롭게 컹컹 짖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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