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시리즈 - 안녕하세요, 이방인입니다.
친구는 중요하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당연한 얘기지만 해외 생활에서 ‘친구’라는 존재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이방인’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 사무치는 외로움을 그나마 희석하는 존재니까. 내게 ‘외국인 친구’ 하면 바로 크리스가 생각난다. 1996년부터 2002년 12월까지 뉴욕에서 살았을 때, 그때 크리스가 내 희석제였다. 그의 서사를 쓰려니 글이 길어질 것 같아 1, 2로 나눈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 도퍼(Cris Dopher)다. 우선 그는 이 세상에 없다. 2019년 8월 25일 밤 11시 10분에 만 47세의 나이로 다시 오지 못할 레테의 강을 건넜으니, 그가 불러도 대답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 된 지 벌써 2년 반이 흘렀다. 그는 내 대학원 동기다. 뉴욕 티쉬 예술 대학원(NYU Tisch School of The Arts)의 무대 영화 디자인과(Department for Stage and Film)에서 크리스는 조명 디자인 전공이었고 난 무대 디자인 전공이었다. 대학원 시절의 난 좀 어설픈 학생이었는데, 마치 동그라미 쿠키 틀에 네모난 쿠키를 꾸겨 넣은 것 같은, 왠지 붕 뜨고 겉도는, 그래서 학장의 눈 밖에 난, 여하튼 희한한 학생이었다. 그건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하는데, 본인도 동의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크리스란 이름에서 h를 빼고 Cris로 써달라고 한 것만 봐도 그런 냄새가 폴폴 풍기지 않는가! (대부분 Chris로 쓴다.)
한 수업을 제외하면 같이 수업을 들은 적이 없어서 가까이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작고 마른 체구, 뾰족한 턱선에 안경을 쓴 그는 딱 봐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똑똑함으로 샤워한 까칠이로 보였다. 독특한 허스키 목소리에 항상 기침을 해서 (그냥 콜록콜록이 아닌 단전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쿠울럭쿠울럭) 몸도 왜소한데 저렇게 감기를 달고 살면 어쩌나 걱정했을 뿐이다. 그가 ‘낭성 섬유증(Cystic Fibrosis)’이란 (폐와 소화기관 쪽 유전성 전신 질환) 병을 가졌다는 건, 그래서 항상 호흡이 가쁘고 기침을 했다는 건, 또 이 병을 가진 사람의 평균 수명이 20세 아래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72년생이었는데 다들 그 나이까지 살아있는 건 기적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같이 아파트를 구하자고 제안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자신이 희한하니 ‘오, 저기 희한한 사람 하나 또 있군’ 하며 ‘선택’한 걸까? 그와 나눈 사적인 대화라고는 학교 작업실에서 숙제하던 내게 불쑥 나타나 ‘색감 좋네! (Nice colors!)’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린 게 다였는데 말이다. 그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2년간 내 룸메이트였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소식을 주고받은 좋은 친구였다. 서로의 SNS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르며 몇천 킬로미터의 물리적 거리를 메꿨고 남북 관계가 나빠질 때마다 그는 호들갑을 떨며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 전쟁 나기 전에 당장 뉴욕으로 돌아와!
그를 말할 땐 어쩔 수 없이 ‘서바이버(survivor)’란 단어를 쓰게 된다. 그쪽으로만 부각되는 게 불만이지만, 스토리를 알고 나면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된. 말 그대로 평생 ‘생존’했으니까. 우선 선천적 낭성 섬유증만 해도 그렇다. 5살을 못 넘길 거라는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 폐 이식 수술을 받은 42살까지, 그는 주변의 환우들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극복하며 버텼다. (그 체력으로 어떻게 그 빡신 3년의 대학원 과정을 견뎠을까? 공연과 숙제에 치여 거의 매일 학교에서 밤을 새워야 했는데, 아침마다 호흡기 치료도 해야 하고 식단도 챙겨야 했으니) 긴 기다림 끝에 새로운 폐를 가지게 된 그는 보란 듯이 마라톤을 뛰었고, 오토바이로 미국 전국 일주를 하며 낭성 섬유증 치료제 개발을 위한 모금 운동을 했고, 수많은 공연에서 멋진 조명 디자인을 선보였으며, 이식 수술 중 병원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성과 약혼도 했다. 숙소는 자기가 해결할 테니 비행기 삯만 마련하라며 결혼식에 꼭 와달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게 잘 사나 싶었는데 이식 과정에서 뭐가 잘못됐는지 암이 왔다. 하나도 아닌 간암과 대장암이 차례로 왔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서바이버 크리스 아닌가! 푸훗, 암쯤이야. 그는 암 두 개를 모두 이겨냈다. 그리고 상태가 조금 나아졌을 때 몇 년 만에 다시 오토바이로 전국 일주를 시도했지만, SUV와 충돌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의 몸이 오토바이와 함께 공중에 붕 떴고 고속도로에 허수아비처럼 사정없이 패대기쳐졌다. 6주 만에 깨어난 그는 조각조각 부서진 프라모델을 다시 조립하듯 회복의 긴 싸움을 해야 했다. 분명 크리스는 그 싸움이 인생의 마지막 싸움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테니. 나는야, 서바이버 크리스. 푸훗, 오토바이 사고쯤이야. 하지만 야속하게도 폐암이 왔고 항암 치료를 시작했지만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그의 몸은 약을 이겨낼 수 없었다. 평생 불사조로 살 것 같던 그도 그때만큼은 날개를 접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겨울이었을 거다. 장소는 721 브로드웨이 학교 건물, 난 학교 게시판에서 룸메이트 구하는 공고를 찾고 있었다. 당시 같이 살던 룸메이트가 남자 친구랑 살겠다며 나가 달라고 해서였다. 그때 우연히 크리스가 지나갔고, 자기도 곧 이사해야 한다며 같이 아파트를 찾자고 제안했다. 90년대 우리나라 정서는 남성과 여성이 룸메이트로 사는 걸 불경스럽게 봤지만 난 그 제안을 수락했고 놀랍게도 한국에 계신 부모님도 허락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희한하다. 얼굴만 아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핑거 스냅처럼 룸메이트가 되다니. 학교 친구들도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미간을 추켜올렸다. 으잉? 까칠이 크리스와 맹한 승연이 같이 산다고? 혹시 둘이 사귀는 거야? 말도 안 돼! 너무 안 어울리잖아!
우린 부룩클린에 방 2개짜리 작은 아파트를 구했고 자기 이름으로 계약한 크리스가 큰 방을 차지했다. 룸메이트로 지낸 2년간 그가 겪은 많은 일에 내가 있었다. 그가 예쁜 고양이 맥과 메이블의 입양 서류에 싸인했을 때 옆에 있었고, 첫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구입하고 자랑질하고 싶어 난리였을 때 내가 있었다. 오토바이에게 붙인 록시라는 이름이 촌스럽다고 놀린 사람도 나다. 2001년 911테러 때 전쟁터 같던 카오스를 뚫고 내가 피신한 곳은 크리스의 극장 사무실이었다. 종종 같이 코니 아일랜드(Coney Island) 부둣가에서 맛있는 핫도그도 사 먹고 프로스펙트(Prospect) 공원에서 롤러 블레이드도 탔다. 난 그가 매일 아침 호흡기를 입에 물고 치료하는 모습을 봤고 (치료 중 그는 누구보다도 오래 살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는 내가 상사에게 일 못 한다고 제대로 깨진 채 돌아와 엉엉 우는 모습을 봤다. 사람들은 우리가 커플인 줄 알았지만 우린 그저 그의 방을 거쳐 간 모든 여자 친구와 내 방을 거쳐 간 모든 남자 친구의 얼굴을 아는, 굴곡 많은 서로의 연애사에 어깨를 토닥이는 좋은 친구였다. 아, 크리스를 얘기할 때 카우보이 모자를 빼놓을 수 없다. 항상 적갈색 낡은 가죽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작은 키를 커버해 주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지금도 그를 생각할 때 이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긴 가죽 코트를 입은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맞다. 독특한 친구였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