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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Dec 20. 2018

질문 다섯: 인종차별은 안 겪었어요?

두말 하면 잔소리


당최 이해가 안 된다. 
왜 이게 인종차별이라는 걸 모르는 거지?



# 시댁에서 눈이 휘둥그레지다.


네덜란드 전통 중 당최 이해 안 되는 전통이 있다. 바로 '은 피트'다. 영어로는 Black Peter, 네덜란드어로는 Zwarte Piet. (‘와르트 피트’라 발음한다) 네덜란드는 매년 산타클로스라고 할 수 있는 신터클라스(Sinterklaas)가 크리스마스보다 이른 12월 5일에 오는데 항상 '검은 피트'라는 조수와 함께 나타난다. 그런데 그 검은 피트의 모습이 희한하다. 검은 피부에 빨간 입술, 황금색 귀걸이와 슬머리, 누가 봐도 인이다. 르네상스 시절의 하인 의상을 입고 어눌한 말투에 어설픈 말썽을 부린다. 신기한 건 주로 인이 이런 분장을 하고 검은 피트 역할을 한다는 거다. 한 마디로 ‘시커먼스’다. 

 

난 검은 피트를 시댁에서 스를 통해 처음 다. 내 눈은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카밀, 저게 뭐야? 저렇게 하고 길거리를 다닌다고? 무슨 저런 고약한 농담이 다 있어?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시부모님은 약간 놀람과 동시에 의문의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 연! 검은 피트 모르니? 신터클라스와 같이 다니는 친구란다. 전통이지.

뭐라고? 전통이라고? 누가 봐도 흑인을 희화화한 게 분명한 저 모습이 전통이라고? 딱 봐도 주종 관계가 분명한데 친구라고? 그때 내 혀끝에 도착한 단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인종차별’. 이 단어가 입 밖으로 나갈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벽난로에서 따다닥 타들어 가는 나무가 말했다. 

- 괜히 좋은 분위기 망치지 마. 말해도 그들은 몰라. 

난 입을 다물었고 애꿎은 카밀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 저게 인종차별이지 무슨 전통이야?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나중에 설명 좀 해줘!

난 다리를 꼬고 팔짱을  채 소파 속으로 몸을 깊게 파묻었고, 가느다란 눈으로 뉴스를 흘겨봤다. 카밀은 내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랐지만, 시부모님은 불편한 내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마 눈치챘더라도 지나치게 예민하다며 나를 하셨을 것이다. 유럽 백인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검은 피트는 이렇게 생겼다.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신터클라스와 항상 함께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전통은 어디까지 지켜야 할까?


네덜란드는 제국주의 시대에 수리남,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여러 식민지를 다스렸다. 이런 역사 속엔 강제로 흑인을 유럽으로 고 와 하인이나 노예로 부린 사실이 있다. 검은 피트는 1850년대 얀 크만(Jan Schenkman)이라는 교사가  ‘성 니콜라스와 그의 하인’이란 동화책에 처음 등장했는데,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배에 선물을 잔뜩 고 온 성 니콜라스를 도와 나쁜 아이를 자루에 담아 스페인으로 데려가는 역할이었다고 한다. (역할 한 번 참 엽기적이다) 설사 학술적으로 다른 유래를 지라도 (신터클라스는 터키인이고 그 조수는 무어인(Moor)이거나 ‘크램퍼(Kramper)’란 가상의 괴물이었다는 가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제국주의의 잔재다. 하지만 이것을 인종차별과 연결하고 싶지 않은 게 이곳 사람들의 심리인가 보다. ‘전통’이라고 내세우며 일부러 보 으려는 것이다.

2011년 4명의 흑인이 '검은 피트는 인종차별주의다! (Zwarte Pete is racism)’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도르트레흐트(Dordrecht)시에서 시위를 한 이후 크게 공론화된 검은 피트는 크리스마스마다 뜨거운 감자가 되었고, 2013년엔 UN 인권위원회에까지 상정되었다. 문제가 계속 제기되자 나름 ‘하인이 굴뚝을 타고 내려와 검은 재가 얼굴에 묻어 검은 피트가 되었다’라고 스토리를 만들었지만 어설프단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검은 피트는 네덜란드 아이들에게 로로만큼 인기가 다. 크리스마스마다 아이들은 검은 피트가 나눠주는 사탕을 기다리고 여러 행사에 재미난 감초 역할을 하는가 하면 신터클라스를 얼굴만 큰 백인 바보로 만드는 영리한 릭터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래서 검은 피트는 대부분의 네덜란드인 마음속에 소중하게 자리 잡은 어린 시절 즐거운 추억이다. 따라서 옹호자들은 어른의 시선으로 보는 정치적 해석 때문에 이런 전통을 바꿀 수 없다고 나름의 논리를 친다. 

그렇다면 ‘전통’은 어디까지 지켜야 할까? 모든 전통이 무조건 지켜야 할 만큼 의미가 있을까? 문화와 그에 따른 가치판단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노예 제도가 지된 지 백 년이 넘었고 이민 2, 3세대가 엄연한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는 지금, 과연 검은 피트가 ‘전통’으로써 어떤 가치를 지닐지 의문이다. 가뜩이나 이민자 및 난민 문제가 을 대로 곪은 유럽인데, 이런 전통은 이들을 더욱 이방인으로 몰아낼 뿐이며 네덜란드 및 유럽의 강대국이 과거 제국주의로 어낸 흑역사에 대해 제대로 통찰하지 않는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현재의 가치를 존중하며 계속 지켜야 할 것과 구시대의 유물로 남겨야 할 것을 잘 구분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전통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반드시 생각해  일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 인종차별은 현재 진행형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진 개인적으로 크게 당한 인종차별은 없다. 카밀이란 멀대같이 큰 백인 남자가 옆에 붙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두 눈을 옆으로 찢는 행동이나, '칭챙총' (중국어를 흉내 내며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말) 소리를 듣는 것쯤은 애교로 넘기지만, 이런 행동의 상당수는 무지의 결과라서 '네가 한 행동은 인종차별이다.'라고 정확하게 짚어준다. (하지만 솔직히 시부모님께 그렇게 말할 용기는... 아직 없다.) 그들의 뿌리 깊은 우월의식은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이나 인종차별인지도 모르는 무지로 불쑥불쑥 드러나는데, 인종차별을 지적할 때마다 자신은 'racist'가 아니라고 발끈하는 그들을 보면서 제대로 된 인식이 자리잡기까진 한참 멀었다는 걸 확인한다. 


논쟁은 계속되고 있. 우리나라도 앞으로 직면할 다문화와 난민 문제를 생각한다면 차별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제다. 벌써 ‘혼혈’단 ‘다문화’로, ‘살색’보단 ‘살구색’으로 표현하는 등 언어에서부터 차별을 방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전통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소수자에 대한 인권 의식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이 문제도 같이 커질 것이다. 

'시커먼스'가 부활했을 때 여론에게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난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도 여전히 검은 피트는 나타났지만, 올해는 다른 모습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전통이란 바로 이런 게 전통이지! 어딜 가도 빛나는 우리의 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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