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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Jan 13. 2019

망원동 우리 집

한국에서 돌아온 지 어느덧 2년.

이 글을 쓰는 지금, 난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
요즘 그렇게 핫하다는 망원동이다.



# 격세지감


망원동 기사를 찾아보면 옛날에는 홍수가 나고 못 살던 동네라고 나온다. 그리고 난 그때 홍수 난 그 물이 얼마나 더러운 지 모르고 그저 재밌다며 수영하며 놀던 땟국물 초등학생이었다. 84년에 일어난 대홍수로 망원동 바로 옆인 서교동 우리 집 지하실까지 물이 찼고 부모님을 도와 죽어라 바가지로 물을 퍼냈다. 당시 전국적으로 피해가 커서 북한으로부터 쌀까지 지원받았던 기억이 난다. 퍽퍽하고 맛은 별로인 쌀이었다.

‘상습 침수지역’이란 불명예가 고작이었던 망원동이 오늘날 소위 ‘망리단 길’이라 불리며 이렇게 핫해지다니, 주말마다 몰려드는 인파에 발 디딜 틈이 없는 걸 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주민들은 ‘망리단길’ 이름을 싫어해서 사용 반대 운동까지 벌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근 3개월 동안 친정집에 머물면서 시골에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하지만 운이 안 맞았는지 좋은 곳을 찾지 못했고,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마포구 성산동에 있는 대안학교인 ‘성미산 학교’에 영어 강사로 나가게 되면서 터전을 학교 근처인 망원동에 잡게 되었다.

옛 동네의 추억을 안고 돌아온 이 일대는 80년대 나의 향수를 마구 자극했다. 옛날 우리 집은 고맙게도 집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사무실로 쓰이고 있었고 몇몇 랜드마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우리 집이 그대로 있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 슬프게도 그 자리엔 신축 건물이 들어섰다. 언젠가 그 집으로 다시 이사하리라 순진하게 다짐했었는데. 난 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난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를 찍는 것처럼 망원동, 서교동, 성산동, 합정동, 상수동, 연남동 등 내 예전 행동반경 동선을 따라 골목을 걸으며 추억 여행을 즐겼다. 확실히 난 노스탤지어에 약하다.



# 망원동 생활


집은 우리 가족에게 딱 맞는 작은 집이다. 방 두 개에 부엌, 그리고 화장실. 12평 정도 되는 것 같다. 생각보다 월세가 비싸서 1-2년 사이에 치솟은 이 동네 부동산 시세를 몸으로 체감할 수 있다. 거실 공간이 없고 채광이 약한 게 아쉽지만 그래도 몇 년 만에 마련한 ‘우리 집’이 소중하기만 하다. 비록 2년 계약 월세 집일지라도 말이다.

유럽에선 세입자를 보호하는 법이 강해서 한 번 입주하면 집주인이 쉽게 세입자를 내보낼 수가 없는데, 우리나라는 뭐든 집주인 마음대로이니 그게 아쉽다. 하지만 까다로운 서류 심사나 인터뷰가 없고 보증금만 있으면 중개인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카밀은 그 점을 높이 샀다. 몇 개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집이 나쁘지 않다. 더불어 미루 방을 따로 꾸며줄 수 있어서 기쁘다.


난 지금의 망원동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미세먼지를 직격으로 맞는 불행이 있으나 그건 비단 망원동만의 문제가 아니니 아주 억울하지는 않다. 미루가 다니는 어린이집도 만족스럽다. (한국의 영유아 교육 시스템은 꽤 좋은 편이다. 9시 반에 등원해서 4시 반 하원 할 때까지 엄마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시간 계획을 할 수 있도록 어린이집 내에서 모든 게 해결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유럽에선 점심은 집에서 먹어야 하고 - 원에서 줄 경우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망원시장에서 장을 보고 유수지에서 걷기 운동을 하고 마포 중앙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한강 공원 놀이터에서 미루가 노는 것을 본다. 마포구민 체육회관에서 저렴한 가격에 요가 수업을 듣고 사방에 널려 있는 값싼 맛 집에서 식욕을 채운다. 아기자기하고 감각적인 상점도 많지만 옛 간판을 그대로 유지한 구멍가게나 철물점, 점집도 많다. 빌라들 사이에 아직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몇몇 가정집이 옛날 우리 집을 연상시켜 정겹다. 젊은 싱글 가구도 많지만 가족도 많고 어르신도 많아서 진짜 ‘동네’ 같다는 느낌이 든다. 주민들 사이의 연계도 좋아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고, 망원시장 상인들이 힘을 모아 대형 마트의 입점을 막은 사례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망원동의 현실도 적나라하게 본다. 새롭게 문을 연 가계가 몇 개월 못 버티고 비어 버리고, 40년 넘게 자리를 지키던 사진관이 오르는 월세를 감당 못 해 폐업을 한다. (그 자리엔 인형 뽑기방이 들어섰다.) 내년이면 ‘탈망원’을 하는 인구가 늘어나겠지. 아니, 벌써 벌어지고 있다.  


유럽의 시골을 방황하다가 돌고 돌아 다시 서울에 자리를 잡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사실 서울에서도 얼마나 지낼지 알 수 없으니 ‘우리 집’을 찾는 여행은 계속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로 만족하련다. 내 작업을 하고 (이렇게 글도 쓰고!), 비록 유럽에선 제대로 못 찾았지만 다른 형태의 공동체 가능성을 열어놓고 천천히 다음 계획을 준비하련다. 이 근거 없는 여유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렇게 망원동에서의 시간이 흘러간다. 벌써 2년째구나.



# 지금 우리 집은 여기다.


미루는 우리에게 한 번도 ‘우리 어디 가?’라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미루에게 ‘어디’라는 개념과 ‘헤어짐’이란 개념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미루가 세 살이었을 때, 두 달간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보인 미루의 반응은 쿨해도 너무 쿨했다. 바뀐 환경에 반응이 없는 미루를 보고 슬쩍 ‘미루야, 여기가 어디야?’라고 물었을 때 미루는 선문답 같은 대답을 했다. 멀뚱멀뚱 눈만 껌뻑이다가 내놓은 대답.


미루 있어.


미루에게 ‘우리 집’이란 그곳이 어디든 현재 있는 곳이 ‘우리 집’인 것 같다. 그 단순한 진실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딸 미루에게서 배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곳이 내 집이고 그 말은 역으로 세상 모든 곳이 내 집이란 뜻도 된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집은 망원동이다. 

여기 망원동에서, 내가 자랐던 이곳에서, 내가 뛰놀았던 바로 그 거리를 내 가족과 같이 걸을 수 있어서 기쁘다. 나중에 미루가 하원을 하면 한강에서 같이 아이스크림이나 먹어야겠다.  


당신에게 지금 ‘우리 집’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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