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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Jan 22. 2019

어떤 노부부

Will you still feed me, when I'm 64.

어떤 노부부를 통해 우리를 본다.


포르투갈 중부, 세라 다 아쏘르 산맥.


# 이웃인 게리(Gary) 할아버지는 70세셨다.


45도로 구부러진 허리에 배 밑에서 올라오는 굵은 목소리의 ‘Hello’엔 10년 넘는 포르투갈 생활이 무색하게 영국 웨일즈 액센트가 강했다. 할아버지는 아내인 노마(Norma)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셨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할머니는 오른쪽 안면과 오른팔을 제외한 모든 몸이 마비된 채 절대적으로 할아버지께 의지하며 사셨다. 전직 목수였던 할아버지는 그 후 할머니의 24시간 간호사가 되어 1년 넘게 할머니를 돌봤다. 사실 할아버지의 허리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저 허리로 무슨 일을 하실까 싶었지만, 그래도 집엔 멋진 목공 작업실이 있었고 동네 이웃의 가구를 고치면서 그럭저럭 생계를 이어가는 듯했다.


천성이 여유로운 할아버지의 유머 감각은 독특해서, 할머니가 눈을 감고 가만히 휠체어에 앉아 계시면 천연덕스럽게 ‘Are you dead? (죽었니?) 하고 물어보셨다. 할머니는 마치 ‘안 죽어서 아쉽지?’라는 듯 씨익 입술을 움직이셨다. 반만 올라가는 입술을 겨우 부둥키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고약한 드라이 유머를 즐기셨다. 가끔은 노골적으로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셨다.

포르투갈 간호사들은 거칠기 그지없다며 병원 때문이라도 집을 팔고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워낙 비싼 영국의 물가 때문에 사실 간다고 무슨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에 할아버지 집을 매물로 올리는 걸 도왔지만 아쉽게도 전화통은 자주 울리지 않았다.


할아버지 집 뒷마당.


# 인생의 특강


선선했던 어느 가을날 저녁, 우리는 이 노부부를 초대해 저녁 상을 대접했다.

카밀이 요리사로 나서 할머니가 좋아하신다는 연어 요리와 영국인임을 고려해 만든 감자튀김을 상에 올렸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연어 살을 골라내 할머니 입에 넣었고, 할머니는 오물오물 씹으며 맛있다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 와중에 할아버지는 음식이 입안에서 왼쪽으로 넘어가면 그 뒤처리는 자기 몫이라며 조심하라고 할머니를 꾹꾹 지르셨다. 미루는 할머니의 휠체어가 신기한지 계속 주변을 왔다 갔다 했고, 그런 미루 모습에 할머니의 반쪽 입술이 다시 씨익 올라갔다.


배부른 식사, 약간의 와인, 즐거운 대화.

할아버지 얼굴에 휴식이 스쳐갔다. 그런 모습을 담으려는 내 카메라를 보자 ‘That’s not necessary. (그런 건 필요 없어.)’라며 손을 저으셨다. 이제 할아버지께 기록이란 버거운 사치일까? 지금의 당신 모습은 기록하기 싫은 마지막 챕터일까?

피곤하신지 할머니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후식으로 커피 한잔 마실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넘어가는 할머니의 고개를 잡고 기어코 커피 한 잔을 다 드셨다. 그리고 몇 분 후, 차에 시동을 거셨다. ‘허잇짜!’ 소리와 함께 배에 힘을 주고 할머니의 온몸을 받아낸 후 천천히 차 안으로 옮기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저 허리로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 초대 정말 고마워. 노마가 병원 외엔 외출을 안 하는데 여기까지 오다니. 노마가 즐거워해서 다행이야. 다음엔 우리 집에서 닭고기를 먹자고!


창밖으로 흔드는 손과 함께 차는 먼지를 날리며 사라졌다. 달은 유난히 밝았고, 그 사이로 흐르는 구름은 고요했다. 카밀과 난 꽤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서 알 수 없는 기분의 출처를 찾아 상념에 빠졌다. 걸어 다니는 인생 교과서가 특별 강의를 하고 간 느낌이랄까. 미루는 달빛 아래 풀밭에서 뛰어다니며 까르르거렸고,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강의를 곱씹었다. 그리고 서로를 더욱 꼬옥 안았다.


미루가 20살이 되면 난 육십이다. 그때 내 모습은 어떨까?


# 누구나 노인이 된다.


내가 70이 되고 80이 될 때 내 옆엔 누가 있을까? 카밀은 먼저 가지 않고 내 옆에 있을까? 내가 아프면 카밀은 할아버지처럼 날 극진히 간호할까? 반대로 나는?

요즘 밖에 나가면 확실히 한국 사회가 고령화된 걸 느낀다. 특히 대중교통이나 공공장소에 있으면 그렇게 어르신이 많을 수 없다. 작년 여름 기록적인 무더위에 백화점, 공항 등으로 모이신 어르신을 보라. 벤치에서 삼삼오오 모여 계시는 그들을 보면 난 늙어서 누구와 백화점으로 피서를 올까, 내 모습이 대입된다.


결코 가벼이 볼 일이 아닌 게 노인 문제인데,
한국 사회는 노인을 받아줄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그냥 적당히 각자 알아서 죽기를 바라는 느낌이다. 왜냐면 노인을 돌보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말 그대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거다.

어렸을 때부터 난 항상 60에 죽으면 좋겠다는 시건방진 생각을 했다. 빨리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인생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여잡고 놓고 싶지 않을 만큼 절실한 인생도 아니었다. 지금도 난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있는 삶의 한계가 내 삶을 더 의미 있게 살도록 동기를 부여할 거라 생각한다. 왜 그리 영생을 바라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미루 때문이라도 60보단 더 살아야 한다. 어이쿠!)

그리고 (사람들이 돌았냐고 말할지언정) 내가 죽고 싶은 날을 골라 편하고 즐겁게 죽을 수 있도록 사회가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즐겁게 죽을 권리’ 말이다. 길고 고단했던 인생, 갈 때만이라도 즐겁게 가야 할 것 아닌가?

난 즐겁게 죽었으면 좋겠다. 조문객의 넥타이를 반으로 댕강 잘라 관위에 놓는 퍼포먼스로 모든 사람을 웃게 했던 백남준의 장례식처럼 내가 가는 길에 날 아는 모든 분이 웃었으면 좋겠다. 난 안락사를 택할 것이다. 2002년에 네덜란드에서 안락사가 합법화되었다. 난 네덜란드에서 죽어야 할까?


게리 할아버지와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이메일을 보내도 당최 답장이 없다.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실까? 작년 여름 포르투갈 온도가 최고 47.4도까지 올라갔는데, 에어컨도 없는 그곳에서 노인네 둘이 어찌 버티셨을까? 할아버지의 구부정한 45도 허리가 인생의 무게를 말하는 것 같아 가슴이 묵직하다.


문득 비틀즈 노래가 생각난다.


Will you still need me.
Will you still feed me.
When I’m sixty four.


서방님, 그때 이 노부부를 보낸 후 안았던 우리의 긴 포옹을 기억하나요. 우리 같이 오래 잘 삽시다.

그리고 내 주변의 모든 분들. 계셔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같이 잘 늙어갑시다.  


할아버지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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