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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Jan 29. 2019

이놈의 빌어먹을 사랑

사랑은 왜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향기로운 꽃보다 진하다고.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바보들의 이야기라고.


사진은 본문과 무관... 한가? ㅎㅎ 베를린 전철 안에서.


# 내 친구 릴리의 사랑 이야기


릴리는 20살이나 많은 뉴욕 출신의 건축가 알렌(Alen) 사이에서 23살의 나이에 올리비아를 낳았다. 바야흐로 21세기요 비출산 시대로 가는 요즘, 한참 창창할 23살에 엄마가 됐다니 살짝 신기하기까지 했다.

알렌은 릴리가 뉴욕을 여행할 때 자신을 호스트 해줬던 사람이었다. 반년 후 그들은 포르투갈에서 다시 만났고 바로 사랑에 빠졌다. 평소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던 릴리는 그에게서 아버지 같은 사랑을 느꼈고 나이 차 때문에 주저하던 그를 과감히 유혹했다. 어떻게, 어떤 표정으로 유혹했을지 충분히 머릿속에 그려진다.

결국 알렌은 뉴욕에서의 건축가 생활을 접고 리스본으로 이주해 릴리와 동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알렌은 자아가 강하고 천방지축 종잡을 수 없는 릴리가 버거워졌고, 나이 차에서 오는 관점의 차이와 육체의 차이는 서로의 거리를 점점 더 벌려놓았다.


알렌의 집 앞에서.


내가 만난 알렌은 능구렁이였다. 큰 덩치에 높은 코, 전형적인 유대인 얼굴, 진하고 검은 곱슬머리에 항상 검은 옷을 입어서 얼핏 보면 패션 디자이너 아이작 미즈라히를 연상케 했다. 굵고 시니컬한 말투에 적당한 관심과 무시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여우 같은 센스, 살짝 뿌려진 MSG 허풍...

솔직히 가끔 난 그가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에 지독한 나르시스트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둘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미스터리다. 하지만 세상에 미스터리 아닌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나와 카밀만 봐도 말이다.


관계가 시들어갈 때쯤 아이가 생겼다. 평소 엄마가 되고 싶다 노래를 불렀던 릴리에겐 축복이었지만 늦은 나이에 아빠가 된다는 게 알렌에겐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새로 시작한 리스본 생활이 좋았던 그는 포르투갈 국적을 가진 아이의 아빠가 되면 포르투갈 비자를 쉽게 얻을 후 있었기에 이를 막지 않았다. 그렇게 올리비아가 태어났고, 육아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같이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알렌은 릴리의 아파트 근처에 다른 집을 구해 이사했고, 자신만의 리스본 인생을 쌓으며 가끔 딸아이를 보러 왔다. 그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포르투갈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배우를 할까 의문이었지만 단역을 맡아 공연한다며 티켓을 주곤 했다. 국제 콘퍼런스에 기자인 척 속이고 들어가 천연덕스럽게 다과를 먹을 정도로 변죽과 수완이 좋은 사람인지라 뭘 해도 그럭저럭 잘할 것이었다.


알렌과 릴리


알렌이 나간 후 릴리는 혼자 올리비아를 키웠지만 결코 데이트를 멈추지 않았다. 육아 때문에 젊음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알렌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건 아니었지만 계속 사랑을 찾아 헤맸다.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아직 알렌을 사랑하지만, 그는 날 정말 돌아버리게 해!’였다.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관계. 서로에게 애인이 생기면 쿨하게 인정하면서도 은근 경계하고 질투하는 묘한 관계.


아! 복잡하고도 복잡한 사랑이여!


한 번은 알렌의 집 앞에서 이 둘과 어울린 적이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가 둘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정확히 기억도 안 난다. 흥분하는 릴리 앞에 알렌은 '거봐,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이런 싸움에 에너지를 낭비할 수 없다는 듯 나에게 '다음에 보자' 하고는 바로 뒤돌아 집으로 가버렸다. 릴리는 대답 없는 그의 등에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 그래, 가라 가! 항상 이런 식이지!

한참을 소리쳤건만 분이 안 삭히는지 계속 씩씩거렸다.

- 봤지? 이러니 내가 저 인간이랑 살겠니?

그랬다. 릴리 성격에 저 인간이랑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눈엔... 둘 다 똑같이 철이 없을 뿐이었다.

- 똑같는데 뭘 그래...

대놓고 솔직하게 말하는 내 의견은 상관없다는듯 릴리는 피식 웃으며 올리비아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개의 뾰족한 얼음산 같은 이 둘의 싸움이 잘 상상이 안 되는가? 그렇다면 우디 알렌의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Vicky, Christina, Barcelona)’에서 하비에르 바르댐과 페넬로페 크루즈가 싸우는 장면을 보길 바란다. 아하! 할테니.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아아~ 저때만 해도 우리 참 푸릇푸릇 했어~!!


# 바보들의 사랑


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향기로운 꽃보다 진하지만 바보들의 이야기인 사랑. 사랑이 뭐길래 이렇게 속수무책 힘들게 사나 한탄하지만 사랑이 있기에 사람으로서 살 수 있는, 진짜 이놈의 빌어먹을 사랑!

릴리와 알렌의 징글징글한 사랑을 보며 내 연애사를 생각하고 나와 카밀과의 관계를 돌아본다. 밀당의 단계 없이 여행 시작과 동시에 커플이 된 우리는 아무래도 그 관계가 여느 커플과는 다르다. 처음부터 탈출구 없이 24시간 붙어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봐야 하는 관계였다.


무엇이 우리를 끈끈하게 하며 또 멀어지게 하는가? 세계를 여행하며 너무나 많은 역사를 공유하는 우리에게, 이 역사는 우릴 옭아매는가, 질리게 하는가, 아니면 더 단단하게 하는가?

카밀과 나 역시 릴리와 알렌처럼 미성숙한 영혼이다. 숙성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고 아직 한참 더 발효해야 한다. 우리가 이 긴 여행을 같이 하면서도 서로 죽이지 않고 여지껏 살아있는 걸 보면 그래도 아직까진 인연인가 보다. 발효를 잘 해서 잘 익은 막걸리나 묵은지가 되고 싶은데, 아직 갈 길이 멀고도 머네..

누구는 나에게 말했다.


승연씨는 진짜 카밀을 사랑하나봐...


아아~ 저 쩜.쩜.쩜.엔 문장 그대로의 의미 이상의 수 많은 뜻이 담겨있거늘!

결코 칭찬만은 아닌 저 쩜쩜쩜... 우씨, 진짜 이놈의 빌어먹을 사랑!!


마마카라바나 프로젝트 때. 릴리와 올리비아.


현재 릴리는 새롭게 만난 멕시코 출신의 아름다운 청년 브루노 사이에서 난 아들과 함께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잘 살고 있다. 브루노는 알고 보니 이미 레인보우 개더링에서 만난 사이였다. 돌고 돌아 다시 연을 맺은 걸 보면 어떤 이들에게는 신이 그리 쉽게 만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가끔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포스팅을 보면 릴리는 릴리 나름대로, 알렌 역시 알렌 나름대로 올리비아의 아빠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난 인간이 결코 사랑에 있어 능동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의지가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닌, 사랑의 종속물이 될 수밖에 없고 그게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하다.

난 그냥 사랑이 하는 대로 놓아두련다.

아직까지 카밀을 내 곁에 있게 해 준 사랑에게 감사한다.


사랑이여!
난 당신의 숙주입니다.
그저 당신 뜻대로 하소서.


사랑은 사랑을 낳지...


Photos by Yellow Duck and Alex Afon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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