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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Feb 03. 2019

남자의 육아

'도와주는'게 아니라 '같이 하는' 것임을.

하늘만큼 높고,
땅만큼 넓고,
바다만큼 깊은,
사랑하고 존경하고 섬기지 마지않은
서방님 우리 서방님!


아기 아기 할 때 미루와 까서방.


# 서방님께 쓴 편지


한참 열심히 육아일기를 쓰던 시절, 미루 10개월 때쯤 카밀에 대해 이렇게 한탄하며 쓴 적이 있다.


하늘만큼 높고, 땅만큼 넓고, 바다만큼 깊은, 사랑하고 존경하고 섬기지 마지않은 서방님 우리 서방님! 소녀, 당신께 제발 부탁하나이다!

1. 미루가 울 때 제발 가만히 안고 달래주면 안 되나요? 빙글빙글 돌리고 하늘로 비행기 태우면 재미있어서 울음을 뚝 그치고 까르르 웃을 거라 생각하나 본데, 그건 정말 유아적인 발상이에요. 서방님 같으면 한참 우는데 웃으라고 옆구리 간질이면 더 팍 돌지 웃을 것 같아요?

2. 산책할 때 제 허리 생각해서 대신 아기띠 매주는 거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제발 미루가 옆으로 기울지는 않는지, 잘 때 머리가 젖혀지지는 않는지 중간중간 살피며 다녀줄래요? 고개가 완전히 젖혀진 채 입 벌리고 건들건들 흔들리며 자는 미루를 보면 그냥 속이 터져요! 그리고 자는 애 내려놓을 때 살살 좀 내려주세요. 미루는 인형이 아니라고요!

3. 미루 잘 때 혹은 재울 때, 제발 문 좀 팍팍 열지 말아 줄래요? 더불어 조금만 조용히 해주면 안 되나요? 서방님도 곤히 자는데 누가 문 팍 열고 들어와 덜그덕거리면 기분 안 좋잖아요. 이게 다 상대방에 대한 조그만 배려에서 출발하는 건데, 당신 딸 좀 배려해 주세요!

4. 미루가 태어나기 전과 태어난 후의 우리 생활은 확실히 다르답니다. 자꾸 ‘예전’ 운운하는데, 이제 우린 부모가 되었다고요. 제발 예전처럼 즐길 거 다 즐기려고 하지 마세요.

5. 제가 뭐 해달라 하면 군말 않고 해 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미리 알아서 척척 해주기를 바라는 건… 그래요, 그건 차마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겠죠? 알았어요. 시키는 거 하는 게 어디예요. 제대로 하느냐는 별개 문제지만서도...  

도대체 '제발'이란 말을 얼마나 하는지... 더 많지만 이 정도로 할게요. 그래도 내 육아에 별다른 딴지 안 걸어서 고마워요. 알아요, 당신 좋은 아빠라는 거. 하지만 요즘 내가 호르몬 과다 분비인가 봐요. 작은 일에도 민감해지고 발끈하네요. 당신 흉보려는 건 아닌데, 그냥 당신이 하는 짓 모두가 미워요...


아빠 안녕!


#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아이가 생기면 커플 사이의 관계는 이전과는 많이 다르게 된다. ‘나름 최선을 다하는데 내가 하는 모든 걸 틀렸다고 구박한다’며 투덜대는 주변의 아빠들을 많이 봤다. 닭살 커플도 예외일 수 없다. 뉴질랜드 천연꿀이 뚝뚝 떨어지는 친구 커플도 아이가 생긴 후 그 섬세함의 차이로 서로 자기 얘기 좀 들어보라며 내 앞에서 하소연의 장을 열었더랬다.

카밀은 창의적으로 놀아주는 건 잘했지만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일엔 꽝이었다. 기저귀 가는 것도, 우는 아이 달래는 것도,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다. 딴에는 의욕이 넘쳤지만 하는 꼬라지를 보면 복창이 터져 차라리 내가 죽지 하며 미루를 낚아챌 때가 많았다.


사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엄마와는 천성적으로 다른 감성일 수밖에 없는 아빠에게 학습할 시간을 줬어야 했다. 여성운동 운운하면서 육아에 있어 동등함을 주장했지만 나 역시 ‘남자는 어쩔 수 없지. 엄마와 아빠의 역할은 달라!’하고 먼저 선을 긋는 함정을 만들어버렸다. 수 세기에 걸쳐 육아에서 제외되었던 남성에게 이제서야 그 역할을 부여하려면 참을 ‘인’자 백 박스를 껴안고서 천천히 가르쳐야 했다. 그리고 같이 공부했어야 했다. 그나 나나 어차피 똑같은 초보 부모였으니까. 그래도 최소한 그는 성실하지 않았던가!

문득 스스로 깨닫는다. 육아, 나아가 진정한 남녀 사이의 평등은 사회 제도와 더불어 여성 스스로가 사회가 규정한 스테레오 타입을 깨뜨릴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아~ 이 세상엔 깨뜨릴 것들이 너무나 많구나.   


네덜란드에서 카밀은 미루를 뒤에 태우고 20일간 저렇게 자전거 여행을 했다.


# 자유부인이 되었다.


작년 여름 카밀이 미루를 데리고 겸사겸사 두 달 반 유럽에 다녀왔다. 고로 난 두 달 넘게 완벽한 자유부인이었다. 근 8년 반 만에 오롯이 혼자 즐기던 그 자유란!! (아아~ 이 자유에 대해선 따로 글 하나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밖으로 나가 처녀 행세하고 싶었지만, 어귀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몸이 너무 아줌마 몸이어서 엄두를 못 냈다는 이런 비극이!)

그런데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밤, 혼자 집에 있으려니 이상하게 내가 그에게 못해준 것만 생각났다. 밥 한 끼를 정성껏 차려줬나, 다정하게 손을 잡아줬나, 마지막으로 불꽃 튀는 토론을 한지가 언제며, 파트너로서 제대로 격려를 해줬나? (카밀의 별명인 '까서방'의 ‘까’가 달리 까가 아닌 까다로워서 까인데, 난 그의 까다로움을 제대로 보듬어 줬던가!?)

생각해보면 난 엄마라는 핑계로 미루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에게는 한 인간이자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거두고 스스로 엄마의 굴레를 쓰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단지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혼자 육아의 짐을 지려고 했던 건 다름 아닌 나였음을 이제서야 인정한다. 나누려고 했던 그의 손길을 내가 거부했다. 결국 바뀌어야 할 건 그가 아니라 나였음을.

갑자기 그의 빈자리를 자각했던 것일까? 그동안 그저 육아에 못난 것만 지적하며 일방적이었던 나를 생각하니 그에게 너무 미안해서 가뜩이나 더운 날씨, 더 더워져서 괜히 물만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화상통화에서의 그들. 자기야, 미루 머리 좀 어떻게 해 봐... ㅠㅠ...


# 내가 이리 간사하다.


일전에 '이방인'이란 예능 프로그램에서 서민정이 뉴욕에서 사는 모습을 보면서 '서민정 참 남편 잘 만났네' 하며 보다가 문득 어느 순간 '아, 서민정이 좋은 사람이구나. 달리 좋은 남편을 만난 게 아니구나.' 하며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유유상종이란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닌 것을. 역시 결국 문제는 나. 그가 좋게 바뀌길 바란다면 내가 먼저 바뀌는 것도 방법인데.


사람은 왜 이리 간사한가! 떨어져 있으니 더 달달해지는 우리.

어느새 난 그에게서 오는 메시지만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인간 사이엔 적당한 거리가 주기적으로 필요하구나. 그가 돌아왔을 때 이 웬수야!하며 엄지발가락으로 엉덩이를 꾹꾹 찌를지라도 지금의 이 달달함은 기필코 즐겨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가 혼자서 미루를 어떻게 챙기는지는 모르는 게 나았다. 보내주는 사진을 보며 애 머리가 왜 그리 귀신처럼 산발이냐, 왜 매일 같은 옷만 입히냐, 씻기긴 하는 거냐 타박을 줄 수도 있지만 아예 신경을 끄는 게 나았다. 신경 쓰면 그 달달함이 깨지고 나만 스트레스받으니까. 그래, 머리가 대수야, 그냥 애 굶기지만 않으면 되지.

그날, 난 저절로 중얼거렸다.

까서방. 보고 싶구려.


Photos by Yellow Duck and Kamiel's friend.


음악을 들려주고,
같은 곳을 바라봐주는 그는 좋은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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