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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by 황서영

얼마 전 강의 준비를 위해 읽었던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를 다시 읽었다. A Man's Place라는 영어 번역서 때문에 <남자의 자리>라는 제목이 채택된 것 같은데, 원제는 La Place이다. 하지만 굴절과 왜곡 없이 '번역'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맥락 그리고 독자인 나 자신의 맥락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 의미를 풍부하게 '해석'하는 것일 테다. 아마도 '자리'라는 제목은 아니 에르노가 깊게 영향을 받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위치' 개념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부르디외가 행위자의 성향(disposition)에 영향을 미치는 장(場)에서의 위치(position)에 주목했다면, 에르노는 그와 그의 부모, 즉 그가 "줄곧 '우리'라고 말하고" 있는 이들이 어떤 자리(place)에서 어떤 자세(position)로 세상을 대해왔는지 그리고 있다(55).


저자가 교사가 되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그렇게 왔다가 떠난 한 남성이 살면서 머물던 사회적 '자리'에 주목한다. 자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며, 다양하게 묘사된 그의 모습이 사실은 고유한 그 자신만의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놓여 있던 자리에 귀속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사실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익명의 존재들이자 자신도 모르게 힘 혹은 굴욕의 징표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서" 공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93). 또한 자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런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그와는 다른 세계로 옮겨간 저자가 그 도정에서 느껴온 다양한 감정들이 자신의 미성숙함이나 옹졸함, 편협함 때문이 아니라 자리이동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경험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자신을 강하게 구속해왔던 위치와 자리에 대한 성찰이 역설적으로 자기를 해방시키는 실천이 될 수 있는 이유이며,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폭넓은 공감을 획득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비슷한 이유로 이 책이 더 많은 공감을 얻지 못할 수도 있음 또한 확인하게 되었다. 작가가 경험한 "모순 사이에서 흔들리는 느낌"(48)은 그가 농민에서 노동자로, 다시 자영업자로 옮겨갔던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러한 "세계의 추억을 마치 저급한 취향의 어떤 것처럼 잊게 하려고 애쓰는"(66)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103)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저버리고 돌아서야 하는 세계를 갖고 있지 않은 이들, 그러니까 애초부터 높은 곳에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작가가 "살던 환경의 수치스러운 장벽들"(48), "끝을 알 수 없는, 계속되는 결핍"(52),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53), "내가 좋아했던 모든 것들이 촌스럽게" 보이는 경험(72), 부모와 자식이 "서로에게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는 관계(76), "자신을 멸시하는 세상에 내가 속해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104) 같은 것이 전혀 와닿지 않는 것 같았다. 실제로 이 책을 읽은 수강생들 중 몇몇의 반응이 나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놀랍고 흥미로웠다. 하강이동을 했거나 언제나 아래쪽에서 살아온 이들의 감각은 또 다를 것이다.


적어도 나로서는 아니 에르노가 느꼈던 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다. 나 역시 오랫동안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언젠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나와 부모 사이의, 유년 시절과 성년기 사이의, 내가 태어난 곳과 지금 살아가는 곳 사이의 거리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해왔다. 아니 에르노를 읽으며 이러한 생각이 한 층 더 강해졌고, 다시 펼쳐본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처음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단한 희열과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나였다면 에르노와는 다른 방식으로 썼을 것 같다. 그가 다양한 작품을 통해 자신의 체험을 드러내고 그것의 사회적 의미를 질문하는 작업을 해왔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가 각각의 책에서 할 (수 있는) 말이 더 많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도 그가 붓터치하듯 묘사한 장면들이 보다 세밀하고 두툼하게 서술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슷한 문제의식 속에 집필된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읽으며 더 깊게 공명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구구절절 말과 글로 다 풀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학자의 뒤떨어진 예술적 감각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붓터치와 점묘로 이루어진 각각의 작품을 다시 모자이크처럼 덧붙여가면서 그가 살아온 프랑스 사회의 풍경과 두께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개별 작품이 아니라 일련의 작업들 전체에 대한 고려 속에 이루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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