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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책들

by 황서영

오랜만에 글을 남긴다. 하루하루 읽고 보고 생각한 것들을 짧게라도 기록하겠다 마음먹었는데 쉽지 않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정도만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쉬운 게 아니었다.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나 생각난 참에 시작해본다.


1. 라투르, 『판도라의 희망』

한 때 푸코가 그랬던 것처럼 요새는 라투르가 하나의 지적 유행이자 교양이 된 느낌이다. 십여년 전쯤 라투르의 저작 일부를 보기도 했지만, 최근의 이 흐름에 덩달아 호들갑을 떨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최근에는 의도적으로 라투르에 거리를 두고 읽기를 미뤄두기도 했다. 반강제적인 계기가 생겨 읽게 된 책이 『판도라의 희망』이었는데,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근대적 인식론의 핵심인 주객 이분법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여 정치와 비판에 대한 독특한 관점까지 제시한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 활동에 대한 민속학적 탐구를 통해 단단한 근거를 확보하는데, 이에 더하여 철학사와 사회이론의 다양한 논의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종횡하는 방식을 감상하는 것 역시 읽는 즐거움을 준다. 아직 라투르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나 그의 견해를 더 이해하고 싶어졌다. 공들인 번역임을 알 수 있지만 영문과 대조해 봤을 때 아쉬운 대목도 적지 않았다.


2. 김건우,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역시 미뤄두고 있던 책 중 하나였는데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저자가 주장하는 이른바 학병세대의 지적, 사상적 영향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김준엽, 장준하 등 각각이 평전의 대상이 될 법한 인물들을 책 한 권의 적절한 분량으로 다루면서도 추가적인 탐구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장준하의 『돌베개』와 김준엽의 『장정』은 현대 한국의 이해를 위한 필독서라 하지만 부끄럽게 아직도 읽어보지 않았다. 함석헌과 민중신학 저작들 역시 일부만 보았을 뿐이다. 적어도 20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한국의 사상사적 유산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대학에서 생산된 것도 아니고 현재의 대학에서 잘 전수되거나 가르쳐지지도 않는 것 같다. 한국에서 대학이란 무엇이었고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진작 여러 편 나온 것으로 아는데 이들 역시 찾아서 읽어볼 계획이다.


3. 황석영, 『손님』

대학시절에 읽고 대단한 작품이라 생각했다가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었다. 감동의 강도는 그때와 달랐지만 신천학살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손님'이라는 제목의 여러 함의, 저자의 방북과 망명 등 이 작품이 써질 수 있었던 역사적 조건 등에 대해 생각하며 읽을 수 있었다. 여러 논란을 몰고 다니는 저자이지만 개인들의 삶을 방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 녹여내는 역량이라는 점에서 보면 역시 이만한 작가를 떠올리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4. 김현미,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최근이라기엔 시간이 꽤 흘렀지만 기록 차원에서 남겨둔다. 저자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과 구별되는 페미니스트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데,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는 가지만 메시지가 강력하진 않았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강연을 옮긴 형식이라 읽기에는 평이했지만 보다 엄밀하고 치밀한 논변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기엔 만족스럽지 않았다. 물론 전반적으로는 만족스러운 독서였는데, 특히 이른바 '여적여' 프레임에 대한 해석이 기억에 남는다. 같은 저자의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 역시 조만간 읽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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