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달
그 와중에 연애도 했냐고? 좀 봐주라. 나름 나의 첫 연애였으니까. 다들 CC 해봤어? 본인들은 비밀로 해도 기숙사 세탁기까지 알게 된다는 CC말이야.
난 절대 CC를 할 생각이 없었어. 만약 헤어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불편해? 학교 사람들도, 교수님들도 할게 되는 걸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하지 않니? 그리고 학교 공부만 해도 얼마나 바쁜데 난 CC 같은 거 절대 절대 안 해. 이게 내 대학생활 모토였지.
“워 시환 니”
이게 무슨 뜻이냐고? 널 좋아한다는 뜻이야.
누구 대사냐고? 내 대사야^^ 한 남자애한테 홀딱 반해버렸거든.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우선 서툰 한국어가 너무 귀여웠어. 그 애는 유학생이었거든. 한국어를 정말 잘하는데 약간 발음이 새. 그게 너무 매력적이야. 절대절대 그 애를 놀리는 게 아니라 뭔가 특별히 더 귀여웠어. 내가 유학생을 한두 명 봤겠냐고. 세상 도도할 것 같은 차가운 얼굴로 서툴게 단어를 하나하나 조합시키며 귀엽게 말하는데 너무 사랑스럽더라.
그리고 옷을 정말 잘 입었어. 우리 과는 점점 갈수록 꾸미는 사람이 없거든. 밤샘작업으로 찌들어있는데 꾸미는 건 사치지. 그 사이에서 달이는 정말 눈에 띄었어. 항상 깔끔하게 머리를 유지하고 옷을 캐주얼하면서도 예쁘게 입고 다녔거든. 그 덕에 남자애들한테도 인기가 참 많았어. 걔가 유일하게 우리 과에서 과잠이 없는 애였는데, 칙칙한 과잠이 예쁘지 않다며 절대 사 입지 않았기 때문이 이야.
마지막으로 이 아이라면 내가 배울 점이 참 많겠다고 생각했어. 하루는 이런 날이 있었어. 그 애가 후배들 촬영을 도와주게 되었어. 하지만, 외국생활의 서러움이란 이런 걸까. 그 애가 유학생이란 이유로 크고 작은 차별을 하더라고. 2시간 거리고 불러놓고 할 일 없다고 보내버리고, 시나리오도 제대로 주지 않았어. 자신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그 애한테 짜증까지 부렸다더라. 난 너무 화가 났지. 물론 좋아하는 애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도 화가 났지만, 외국인이란 이유로 그런 일을 당하는 게 너무나도 화가 났어. 그래서 난 그 애에게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흥분하며 이야기했어.
“너 걔네 도와주지 마. 진짜 예의 없어 걔네”
그러니까 걔가 뭐 하는 줄 알아?
“걔넨 예의가 없다. 하지만 난 예의가 있는 사람이요. 난 끝까지 도울 거야.”
내가 한눈에 뿅 가게 안 생겼냐고.
고맙게도 그 애도 날 좋아하고 있었어. 왜 나를 좋아했는진 아직까지도 알 순 없지만, 나에게 준 사랑을 생각하면 분명 날 많이 좋아해 줬어.
내가 그 애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날 그 애는 거절 아닌 거절을 했어. 자신은 날 시간을 두고 좀 더 알아보고 싶다고. 관계에 대해 정말 조심스러운 아이였지. 생각도 많고 정말 신중했어.
반면 나는 불도저야.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해야 하고,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해야 해. 반했으면 반한 이유를 말해줘야 하고, 사귀고 싶으면 고백을 해야만 해. 시원치 않은 그 애의 답변이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존중하기로 했어. 그런데 웬걸? 딱 일주일 뒤에 우린 아무도 없는 밤골목에서 키스를 하며 사귀게 되었지. 그 애는 생각보다 자기가 나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이야기해 줬어.
그리고 우린 2년을 사귀었어. 다행히 졸업 후에 헤어졌기 때문에 CC들이 걱정하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진 않았지.
그 애는 배려심이 있었어. 사귀고 얼마 되지 않아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어.
“만약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보내줄게. 널 원망하지 않고”
그 배려가 날 서운하게 만들었어. 하지만, 그만큼 나를 생각해 주는 거라 믿었지. 정말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가도 그 애는 날 원망하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 애는 날 원망하지 않고 이해해 보려 노력했을 것 같아.
우린 매일 붙어 다녔어. 나도 지방에서 올라와 학교생활을 했고, 그 애는 아예 외국인이었으니 낯선 땅에서 학교생활을 한 거잖아. 우린 서로 많이 의지하고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어. 항상 함께 밥을 먹고, 노래방을 갔지. 우리의 시작 곡은 드라마 <도깨비> Ost <Stay with me>였어. 그 애는 드라마 <도깨비>를 정말 좋아했거든. 나에게 여주인공을 닮았다는 망언도 서슴없이 뱉곤 했지. 그리고 마지막 곡으론 항상 거북이의 <빙고>를 불렀어.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어 어떤 게 행복한 삶인가요. 사는 게 힘이 들다 하지만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
그 애는 내가 힘들어할 때면 항상 저 노래를 흥얼거려 주었지. 그리고 날 꼭 안아주었어. 어떤 일이 있어도 나와 함께 해주겠다며 말이야.
그리고 정말 그 애랑 만나면서 난 많은 일들을 겪게 되었어.
하필 그 애와 연애할 때 내가 무너질 사건들이 생기더라. 앞서 이야기해 준 사건들부터 소소한 사건들까지. 난 많이 지쳤고, 그 애는 지친 날 보는 걸 지쳐버렸어. 우린 점점 말을 하지 않았어. 난 그때 옆에서 누가 어떤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거든. 걱정과 불안, 답답함이 날 잡아먹어버렸지.
나는 그 애에게 바닥을 보여주고 말았어. 그날은 정말 그 애의 모든 것들이 짜증 났어. 심지어는 이렇게 힘든 날 두고 왜 웃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어. 그 애는 애써 입꼬리를 올린 건데 말이야.
“너 왜 웃어? 재밌어?”
나중에 들었는데 내가 바닥을 보여준 그날이 그 애에게 가장 큰 상처가 만들어진 날이었대.
하루는 그 애가 나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며 나를 앉혔어. 피아노가 나오는 영화였는데, 두 주인공이 미끄러지는 배 안에서 목숨을 걸고 피아노를 연주를 했지. 사실 그날도 난 거의 집중을 하지 못했어. 그래서 제목도, 내용도 잘 기억이 안 나. 그런 날 보고 그 애는 나와 마주 보고 앉아 말했어.
“하평. 달이 떴어.”
그 애 말에 난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올려다봤어. 커다란 보름달이 있더라. 눈이 부실만큼 환하게 빛나고 있었어.
“달에게 소원을 말하면 들어준다.”
그 애의 말에 난 직감했지. 아, 나 지금 연애할 때가 아니구나. 그리고 그 애도 똑같이 느꼈던 것 같아.
“이젠 저 달이 너의 달이야.”
그 애의 말에 난 눈물이 나지 않았어. 미안하고 허무했거든.
“난 이제 너의 달이 되지 못해.”
그리고 그 애는 날 떠났어. 한국에서 괜찮다는 정신과 리스트를 주면서 말이야.
내가 그 애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정말 고생 많았어. 그리고 미안해.
잘 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