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진경의 고요한 여행]
혜선과 수아가 빠져나간 자리엔 알록달록한 물건들만 남아 있을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경의 물건과 대비되는 색깔과 움직임, 소리의 높낮이, 그리고 냄새까지도 모두 멈추고 아무런 소리 없이 공기의 흔들림만 고요하게 들렸다.
진경이 처음 이 집에 들어와 텅 빈 집에 누었던 날이 생각났다. 진경이 고른 흰색 종이 벽지가 온 집안에 붙여지는 것을 종일 기다리다가 저녁때가 돼서야 현관문을 닫고 온전히 혼자 남게 되었다. 전에 살던 사람들의 색깔과 냄새가 모두 사라진 무채색 그대로의 집. 커튼이 사라진 창문은 차가운 사각형 그대로 모양을 드러냈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졌던 공간은 텅 비어 공기만 있었다. 해가 지고 캄캄해진 집안에 모든 불을 끄고 거실 한가운데 가만히 누워 그 공기 소리를 들었었다.
진경이 자신만의 고요한 공간, 이 집을 마련했을 때, 혜선은
"넌 정말 혼자 살겠구나."
집을 둘러보면서 말했었다.
"가끔 와서 쉬고 가"
진경이 혜선에게 말하면
"여기 와서 쉬면 너에게 무척 미안할 것 같다. 너무 너의 공간이야.
진경, 좋아 보인다."
혼자 있는 것이 좋았지만 혜선이 들어와 집안 곳곳에 색깔을 입힐 때도 나쁘지 않았다. 혜선은 늘 진경의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에 손대지 않았고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을 혜선의 색깔로 만들었다. 그래도 작은 집에서 함께 살면서 진경만의 공간은 점점 작아지고 흐릿해졌고 진경도 조금씩 무채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딱 그쯤 혜선은 수아를 먼저 40년 만에 만난 엄마에게 맡기고, 자신은 자유 혹은 더 늦기 전에 원하는 여행을 하러 떠나 진경이 잊었던 공기 소리를 다시 듣게 했다.
마흔 하나, 생각해 보면 41살이 될 때까지 진경은 늘 야근과 과로를 반복하며 누구보다 성실히 일하면서 휴일이 되면 삶의 의미와 방향 같은 야근을 줄이거나 과로를 끝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을 하곤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 건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놓고 아주 잠시라도 멈춰야 숨 쉴 수 있었다.
5년간 혜선과 수아와 함께 살며 가끔 질문을 놓치곤 했다. 아이가 자라고 친구가 웃고, 함께 따뜻한 저녁을 먹는 순간에 진경의 질문을 뺏겼다.
예전에도, 그때도, 지금도 진경은 그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어쩌면 영영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답을 찾더라도 질문은 계속할 것이고 답은 계속 변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지 모른다. 질문은 진경이 숨 쉬고 흔들려서 휩쓸려 가지 않는 방법일 뿐일 것이다.
혜선이 인도로 떠나고 처음 3~4일은 어색하고 허전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모두가 안전하게 잘 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조용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진경은 일을 잠시 놓고 몰입하고 싶을 만큼 고요가 즐거웠다. 혜선과 수아에게 미안하리 만큼.
글을 쓰고, 명상을 하고, 일상을 돌보고, 노을을 보고 3주간 말을 하지 않는 고요한 삶이 진경을 건강하게 했다.
남쪽 거실 창으로 해가 뜨고 오전 내내 침실을 깊숙이 비추다 서쪽창으로 노을을 보여 줄 때까지 진경은 햇빛을 따라가며 휴식과 조용한 집을 사랑했다. 햇빛의 색깔과 농도가 달라지는 것,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변해 바람과 냄새가 달라지는 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