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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아리 Mar 18. 2023

 나는 걱정 않는 엄마입니다.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지난 4월 고2가 된 지 한 달이 지났을까, 첫째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몇 년을 궁리해 오던 것이라  체념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요. 막상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아이를 보니 아무리 쿨 한척하려 해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걱정은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알아요. 아이의 미래는 누구보다도 아이가 가장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걸요. 앞날에 대한 '걱정'의 주인은 이제 엄마인 내가 아니라 아이라는 것을요. 그럼 부모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엄마',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아이가 커가며 양육자의 역할은 조금씩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18살인 큰 아이에게 엄마인 저는 든든한 조력자이고 지지자이면 됩니다. 판단이 서지 않을 때 무엇이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이지 해답을 주는 존재는 더 이상 아닌 것입니다.

과거 저 또한 걱정 많은 엄마였어요. 그도 그럴 것이 꽤 오랜 기간 아이는  마치 동굴을 파고 겨울잠을 자는 곰 마냥 늘 방에 갇혀 지냈거든요. 그렇게 가라앉았다가도 한 번 감정이  터지면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어대는 통에 저의 멘탈 또한 탈탈 털리기 일쑤였죠.


한 마디 훈계라도 하게 되면 아이는 있는 대로 화를 터뜨렸습니다. 그때는 하루 24시간을 꼬박 아이 걱정에 사로잡혀 지냈던 거 같아요. 심리 치료를 해도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처음 가졌던 기대는 실망이 되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혹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이를 다그쳤던 거 같아요. 지나고 생각하니 가만두었으면 됐을 것을 왜 그땐 떠오르는 생각을 눌러 담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순수한 걱정이라기보다는 참을성의 한계를 넘어선 엄마의 분노 표출이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5학년 가을 때쯤이었을 겁니다. 스마트폰 의존성이 강한 아이가 걱정이 되어 한바탕 쏟아내고 있는데 다른 때와 달리 아이가 묵묵히 듣고 있는 거예요. 그러고는 뭔가 잠시 생각하더니 저를 부르더군요.




엄마, 기다려 주세요.

마음속에서 '쿵'하고 내려앉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도 참고 견디고 있었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내가 아이를 너무 내몰았구나.'

 걱정과 분노에 사로잡혀  아이를 미워하던 마음에 구름이 걷히자 드러나는 태양처럼  '사랑'이라는 본질이 불쑥 모습을 나타낸 것이에요.


그날 이후, 엄마인 저는 걱정과 비난의 입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제 행동들이 모두 멈춘 것도 아니었는데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서부터 진짜로 아이를 기다리게 되었던 거예요.

변화는 서서히 시작되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하루하루. 그로부터 1년 후, 그 무엇에도 의욕이 없던 아이가  자전거를 사달라고 하더군요. 그때 한창 윈드브레이크라는 웹툰이 인기를 끌던 때였어요. 그 영향으로 아이들 사이에 픽시 자전거 바람이 불었는데 운동 신경도 없고 움직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던 아이가 3일을 꼬박 연습하더니 쌩쌩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관심은 자전거 액세서리로 옮겨가더니 이후 웹툰으로, 그림으로, 일본어로, 영어로, 러시아어로 진화를 거듭하며 관심사의 폭을 널혀갔죠. 아이에게 변화를 가져다준 것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엄마의 걱정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이와 부모 사이에서 '걱정'은 어떤 형태를 갖춰야 할까요?


걱정이라는 거? 누구나 있죠. 무엇이든지 그러하듯 '걱정' 또한 적당히 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또 어느 정도의 걱정은 필요하기도 하고요. 너무 느슨하게 생각하다 보면 나 아닌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걱정이 너무 지나치면 마음에 무리가 옵니다. 걱정을 계속 굴리다 보면 사이즈가  점점 커져 통제 불능의 불안으로 자라나  마음에 병을 만듭니다.

'걱정'은 '생각'하는 행위입니다.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은 것들에 관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생각만으로 키워내 마음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게 걱정입니다.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이 개운해진 적 있으신가요?


저는 20여 년 가까이 아이들에게 논술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 담임 선생님은 매년 바뀌는 것과 달리 보통 3,4년 이상을 아이들은 저와 함께 합니다. 그러다 보니 친밀도가 높은 편이죠. 그래서일까요? 수업만 오면 진실의 입이 터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선생님, 저 이번에 엄마에게 거짓말했어요. 도덕 수행평가 45점 맞았는데 80점이라고 했어요. 저 어쩌죠? 선생님?"

"선생님, 저 이번 영어시험 100점 맞았어요. 제 생애 첫 100점이에요. 그런데 과학은 망했어요. 60점이에요. 엄마에게 그냥 잘 봤다고 했어요. 어떻게 하면 엄마가 계속 모를까요?"


의도치 않은 거짓말에 아이들 자신 또한 많이 힘들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이들은 맘 졸여가며 거짓말을 하게 될까요?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아이의 거짓말이 이해가 갈 때가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대개 걱정이 많으세요. 긴 통화 속에 생각의 꼬리 물기를 이어가죠. 알다시피 걱정은 하면 할수록 안 좋은 쪽으로 크기를 키워 나갑니다. 엄마의 걱정을 매일 들어야 하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가 만족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어떻게든 피하고 싶게 되는 것이죠. 또 한 바가지 걱정을 들어야 하니까요. 부모님들은 '대화'를 한다고 여기지만 아이들에게는 칼끝을 대하는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요인들이 사람이 하는 걱정의 양과 질을 결정합니다. 그중에는 개인적인 성향도 있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방향, 해결의 실마리를 어디에서 찾는지 가치관의 차이도 있고요. 자존감도 영향을 줍니다.

부모의 걱정은 혼자만의 영역에서 머물지 않고 울타리를 넘어 자식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데에서 조심할 부분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적절한 '걱정'의 범위는 아이가 부모에게 보호받고 있고 기댈 곳이 있다는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바로 거기입니다.



걱정의 꼬리달기를 멈추고

관계를 챙기세요.



괜한 걱정으로 관계를 망가뜨리지 마세요. 아이들은 자신을 지지해 주고 묵묵히 지켜봐 주는 부모를 존중합니다. 걱정거리나 문제가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압니다.

사춘기 무렵이면 무기력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당연히 걱정이 되죠. 하지만 그 걱정은 부모의 몫이에요.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다고요? 관계만 좋으면 아이들은 언젠가 제  자리를 찾아옵니다. 자신을 믿고 지지하고 있는 부모님에게 믿주고자 하는 마음이 아이들에게 작동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관계가 어긋나면 어떻게 될까요?


 있던 의욕의 불씨마저 꺼버리는 실수를 저지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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