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란샤쓰 그 신후 Feb 06. 2022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2부 - 챕터# 19. 감정이 생겼다면 더 이상 살인 병기가 아니지...

    무토의 눈에 여자가 들어찼다. 하악 거리는 신음이 꺼져가는 새의 숨소리 같았다. 너무 많은 상처를 입어 빗물의 무게에도 죽어가는 새... 

    순간 무토의 시야에  펑! 소리와 함께 새하얀 빛이 보였다.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였다. 강한 빛이 한순간 눈을 마비시켰다가 밝아지자 사방에서 시끌한 웃음이 섞여 들었다. 여자가 웃고 있었다. 옆에 나란히 선 남자도 웃고 있었다. 조금 전 터졌던 빛처럼 환하게. 

    무토의 목구멍 아래에서 슬프다는 감정이 또렷해졌다. 어떤 소리라도 마구 내지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었다. 그것이 울음인지는 모르지만.  

    

무토를 향해 마주 서 있던 마츠이가 혁대를 풀고 바지를 벗었다. 보란 듯이 팬티마저 쓱 벗어 보였다. 늘어진 성기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오늘은 특별히 이걸로 찔러주지."

    마츠이가 깨진 병을 흔들어 보이고는 돌아섰다. 침상에 가더니 정혜의 배 위에 올라타고는 무릎으로 두 팔을 눌렀다. 정혜가 고개를 흔들며 몸을 들썩거렸다. 하지만 그 힘이 너무 약해 반항이라기보다는 헛된 몸짓에 가까웠다. 무토와 정혜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정혜가 울음 같은 비명이 흘렸다. 삐죽빼죽한 병의 절단면이 정혜의 옆구리에 박힌 직후였다. 마츠이가 병을 뽑자 벌컥 핏물이 흘러내렸다. 한 손 가득 피를 묻히더니 손가락을 쪽쪽 빨며 피맛을 즐기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억이 나나? 감정이 느껴져?"

    굳은 무토의 얼굴은 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마츠이가 피 묻은 손으로 정혜의 가슴을 움켜쥐고는 깨진 병을 들어 보였다.

    "지켜보자고. 이걸로 여길 자르면 네 표정이 어떻게 바뀔지."

    침묵 속에서 '끼릭' 소리가 들렸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였다.  

    "가만히, 계십시오." 

    유토가 떨리는 음성으로 쥐어짜듯 내뱉었다. 무토가 일어섰다. 지켜보는 마츠이의 표정에 호기심이 들   어차기 시작했다. 

    "쏩니다. 움직이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휙 작은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딱 소리가 울렸다. 무토가 번개처럼 상체를 돌리면서 유토와 야마구치의 머리통을 맞부딪혀서 깨버린 것이다. 비명조차 지를 새도 없이 두 병사는 털  썩 널브러졌다. 무토가 조용히 유토의 소총을 집어 들었다. 

    "총 내려. 안 그럼 여자는 죽는다."

    마츠이가 이미 베개 옆에 놓아둔 케이바(미군 군용칼)를 들어 정혜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험악해진 마츠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감히 내 부하를 죽여?" 

    무토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금이 갔겠지만 바로 치료받는다면 죽지는 않을 겁니다." 

    "죽여버린다!!"

    마츠이가 괴성을 내지르며 케이바를 정혜의 목에 쑤셔 넣으려고 했다.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마츠이가 반대편 손에 쥐고 있던 유리병이 터져 나갔다. 짧고 굵은 비명과 함께 마츠이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일초도 안돼 소총 개머리판이 날아들었다. 이번에 더 격한 비명이 터지면서 마츠이의 몸뚱이가 침상 아래로 떨어졌다. 무토의 다음 동작은 신속했고 철저했다. 소총을 멀리 내던지고는 마츠이의 영국제 권총부터 찾아 확보했고, 케이바도 챙겼다. 야마구치의 소총에서 탄창을 분리하고 두 병사의 맥박을 확인했다.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맥박은 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혜의 옷가지를 챙겨 침상으로 다가왔다. 

    "병기.. 야..."

    아직 아편의 기운에 헤매는 목소리가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무토는 말없이 옆구리 상처를 확인했다. 찔린 병의 자국은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피는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혜를 일으켜  벽에 기대게 했다. 침대보를 길게 찢어서 상처 부위를 압박하며 몇 겹으로 감은 후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정혜가 거의 다 입었을 무렵 등 뒤에서 마츠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마츠이는 얼굴에 박힌 유리 파편 때문에 피칠갑이 된 상태였다. 

    "여자를.... 얼마든지 바로 죽일 수 있었다는 건 알겠지?"

    무토가 일어서서 마츠이 앞으로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왔다는 걸 확인하려고."

    "왜입니까?"

    "왜 기억이 돌아오면 안 되냐고?"

    마츠이가 한숨인지 신음인지 묘한 소리를 내더니 정혜와 눈이 마주쳤다. 정혜는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다. 마츠이를 노려보며.  

    "감정이 생겼다면 더 이상 살인 병기가 아니니까." 

    "여자. 알고 있었습니까?"

    "봤잖아. 여자가 기무라 방에서 나오는 거. 죽이라 한 것도 기무라다. 짐승 밥으로 적당한 데에 던져버리란 것도."

    무토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눈에는 혼란이 깃들어 있었다. 무엇을 믿고 믿지 말아야 하는지...   

    "그냥 돌려보내면.... 왜 안됩니까?"

    "멍청한 새끼야. 어디로? 어떻게? 우리도 못 나가. 이 지옥에서는!"

    무토의 두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무엇을 기억하나. 무토?" 

    무토가 정혜를 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런 개지랄을 칠 정도면 뭐라도 생각났을 거잖아!"

    무토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마츠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 갑자기 차분해졌달까...? 

    "그렇다면 여자를 죽여. 증명을 해라.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보고 하지 않는다." 

    "......."

    "여자는 결국 시체가 돼. 이 땅에서 살아남을 곳은 없으니까. 기무라는 너 사랑하잖아. 여자를 죽이고 용서를 빌어. 조센징 새끼가 황군 계급장 달고 살 방법은 그거뿐이다."

    흔들리던 무토의 눈동자가 멈췄다. 먼 곳에서 바람처럼 흘러든 소음을 감지한 탓이었다. 무토의 예민한 감각을 익히 알고 있던 마츠이가 바로 알아챘다. 

    "오고 있구만. 네가 여기 왔을 거라는 건 기무라도 간파했을 거니까." 

    무토가 정혜를 바라봤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정혜의 두 빰은 이미 젖어있었다. 무토를 한참 바라보던 정혜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눈물 줄기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게 해.... 눈물은 그런 의미였다. 

    "선택해라, 무토. 2분 뒤에 네가 어디에 서 있을지." 

    무토가 정혜를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텅 빈 벽 한 곳을 향했다. 육중한 수송트럭의 엔진음이 마츠이의 귀에도 생생히 들려왔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무토가 다시 정혜를 향했다. 빠져나간 피만큼이나 기운이 빠진 정혜는 종이 한 장도 찢을 힘도 없어 보였다. 입술이 떨리며 겨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도... 돼...."

    무토가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마츠이를 향했다. 마츠이가 피로 물든 이빨을 내보이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토가 툭 하고 마츠이의 머리 쪽 급소를 쳤다. 가벼운 소리였지만 기절하기에는 충분한 세기였다. 



    기무라는 작전상황실에서 유선전화기를 가슴께에 끌어당겨 놓은 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수시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2, 3분마다 시간을 확인했다. 수색대 비상 대기조가 출동한 후 거의 두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비명처럼 유선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에서는 대대장을 호출하는 통신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곧바로 터져 나왔다. 

    "대대장이다. 고다 소대장은?" 

    '잠시 대기'라는 대답 후 바로 고다 2 소대장이 통신을 이어받았다. 

    "어떻게 됐나? 무토는?"

    보고를 받는 기무라의 동공이 확 열렸다. 얕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고, 수화기를 쥔 손이 파르르 떨리며 결국에는 수화기를 던져버렸다. 수화기에서는 '대대장님'을 외치는 소리와 '위생병', '지원' 같은 단어가 쏟아지고 있었다. 

    식은땀을 느낀 기무라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피하고만 싶은 불길한 운명의 실체.... 그것은 자신의 과욕이었음을. 

    되돌릴 방법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전혀. 아무것도. 

작가의 이전글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