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발자국에 고인 눈물

- 붉은 황톳길 위에서 타인의 아픔을 읽다

by 노란 잠수함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공기의 밀도가 달라진다.

교외의 한적한 도로 끝, 숲이 숨겨둔 붉은 길 하나가 나타났다. 지인이 귀띔해 준 황톳길이다. 해거름 녘,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그 길 앞에서 나는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신발을 벗어 손에 드는 순간,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가죽신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발이 비로소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시간이다.


조심스레 첫발을 내디뎠다.

여름 산은 마치 온갖 약초를 달이는 듯 오묘한 향을 피워 올리고 있었고, 발끝으로 전해지는 미끈하고 진득한 흙의 감촉이 발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단 몇 걸음만으로 마음이 가벼워져, 나는 어느새 바람을 타고 오르는 연(鳶)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땅을 내려다보니, 그 길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질퍽한 황토 위엔 이미 수많은 발자국이 겹쳐 있었다. 움푹 파이거나 오목하게 들어간 갖가지 모양의 흔적들. 마치 화랑에 전시된 판화 작품 같은 그 자국들을 보며, 나는 아직 식지 않았을 누군가의 체온을 상상했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붉은 흙을 밟았을까.

누군가는 병든 몸을 이끌고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불합격 통보에 상한 속을 다독이며 걸음을 옮긴 취준생이었을지 모른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자식이 슬픔을 삭히기 위해, 혹은 생의 벼랑 끝에 선 가장이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꾹꾹 눌러 걷던 발자국일 수도 있다.


황톳길이 이토록 붉은 이유가 어쩌면, 그 고단한 마음들이 흘러들어 누군가의 눈물과 설움, 아픔과 상처가 늘 고여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나는 그 겹겹이 쌓인 사연들 위에 조심스레 내 발자국을 포개어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잠시나마 흙의 위로를 받고, 상처받을 각오를 하며 다시 단단한 가죽신에 마음을 숨긴 채 저 바람 부는 세상으로 돌아갔을 그들의 뒷모습을.


되돌아 나오는 길, 나는 소망했다.

그들의 발과 내 발이 언젠가 다시 이 길 위에서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때는 이 우묵한 자국마다 아픔 대신 희망의 꽃씨를 하나씩 심으며 걸을 수 있기를.


세족장에 도착해 흙 묻은 발을 씻어냈다.

발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물이 연꽃 방죽으로 연하여 흘러들었다. 흙탕물이 씻겨 나간 자리에 드러난 발은, 처음보다 한결 맑아 보였다.


세상은 여전히 삭막하고 마음 둘 곳 없다지만, 가끔은 이렇게 낯선 이들의 발자국에 새겨진 사연을 헤아리며 걸어볼 일이다.


나는 다시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매고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등 뒤에 두고 온 황톳길 어딘가에서, 우리가 간절히 찾아내고 싶은 희망의 씨앗들이 지금도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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