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그릇에 담긴 연서(戀書)

- 삼키고 나서야 비로소 읽히는 마음의 문장들

by 노란 잠수함

오늘 아침,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단호박 팥죽 한 그릇이 놓였다. 황금빛으로 잘 익은 단호박과 자줏빛 팥알이 어우러진 색감이 유독 곱다. 첫술을 뜨자 달큼하고 뭉근한 맛이 입안 가득 사르르 퍼진다. 따스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온몸을 데우고, 덩달아 마음의 온도계 눈금도 서서히 올라간다.


직접 요리를 해본 사람은 안다. 이 한 그릇에 얼마나 무거운 시간과 정성이 스며있는지를. 짐작건대, 아내는 돌처럼 단단한 단호박을 자르고 그 두꺼운 껍질과 씨름했을 것이다. 팥을 여러 번 헹궈 압력솥에 삶아내고, 찹쌀은 미리 씻어 불린 뒤 씹는 맛을 살리기 위해 적당한 크기로 갈았으리라. 그게 끝이 아니다. 모든 재료를 한데 넣고, 바닥이 눋지 않도록 불 앞을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저었을 터이다. 그러한 수고와 인내의 시간이 쌓이고 나서야 비로소 죽 한 그릇이 완성된다.


흔히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감정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실체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사랑은 때때로 아주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다만 그 모습이 너무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노동의 옷을 입고 있어, 우리가 자주 놓치고 지나칠 뿐이다.


오늘 아침의 죽은, 아내가 내게 쓴 한 통의 연서(戀書)다. 나는 숟가락으로 떠넘기는 것이 죽이 아니라 ‘마음’임을 알기에, 한 술 한 술 천천히 씹으며 그녀의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단호박과 팥이 섞여 고운 빛을 내듯, 남은 삶도 서로 다른 우리가 어우러져 살고 싶다는 고백. 달큼한 맛이 기운을 북돋듯,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자는 다짐. 찰진 찹쌀만큼이나 끈끈한 사랑을 오래도록 이어가자는 약속. 그리고 혹여 사랑이 너무 과해 서로에게 눌어붙지는 말자는 위트 있는 추신까지.


사랑은 이렇듯 또렷한 물성(物性)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일상 속에 은유나 상징으로 숨겨져 있다. 때로는 암호 같은 ‘모스부호’처럼 작고 미세해서 찾아내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신호를 스스로 해독해 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사랑은 그 뿌리를 현실에 단단히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이란 스스로 빛나기보다, ‘발견될 때’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발견을 위한 첫 번째 열쇠는 바로 ‘감사’다.


사랑을 찾아내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상대를 ‘감사의 렌즈’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비단 부부 사이뿐만이 아니다. 부모든 자식이든 마찬가지다. 처음엔 어색하겠지만, 익숙해지면 무심히 지나쳤던 흑백의 일상이 총천연색 사랑의 조각들로 빛나기 시작할 것이다.


감사라는 렌즈를 끼고 보면, 아무렇지 않게 받던 엄마의 밥상은 딸에게 보내는 한 편의 서정시가 되고, 무뚝뚝한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도 다정한 안부 인사가 된다. 현관 앞에 가지런히 돌려놓은 신발, 보온병에 담긴 따끈한 커피에서도 숨겨진 사랑의 문장을 읽어 낼 수 있다. 사랑은 늘 거기에 있었지만, 우리가 문맹(文盲)처럼 읽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제야 깨닫는다. 사랑은 특별한 날에 주어지는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순간들 속에 쌓여가는 가장 흔한 기적임을.


사랑은 교감을 거쳐 공감으로 나아갈 때 완성된다. 편지를 받았다면 답장을 보내는 것이 예의다. 아내의 연서(죽)를 읽었으니, 나 또한 사랑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거창한 방식은 필요 없다. 감사로 읽어냈으니, 감사로 답하면 될 일이다.


출근길, 차 시동을 걸어둔 채 아내에게 답장을 보낸다.


“죽, 정말 맛있었어. 고마워요. 사랑해.”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오늘 아침 우리 사랑의 뿌리가 한 뼘 더 깊고 단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