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이 가지지 않아도,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한 오늘
내 곁에는 기특한 난초가 하나 있다. 원래는 동료가 전근을 가며 두고 간 것이었다. 그저 주인 잃은 녀석이 안쓰러워 물이나 주며 잠시 돌봐주자는 마음이었는데, 뜻밖에도 녀석은 올해 두 번이나 꽃대를 올리며 내게 맑은 향기를 선물해 주었다.
처음 꽃이 피어날 땐 그저 반갑고 신기했다. 하지만 다시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을 때는 도리어 걱정이 앞섰다. 산고(産苦)가 채 가시기도 전에, 저 여린 몸으로 또다시 꽃을 피워내려 하다니. 무리가 되는 건 아닐까 싶어 마음이 쓰였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기어이 마지막 꽃을 피워 올린 직후, 녀석의 잎은 급격히 마르고 생기를 잃어갔다. 급기야 생사의 갈림길에 설 만큼 시들어버렸다.
그렇게 포기하려던 찰나, 기적이 일어났다. 말라비틀어진 틈바구니에서 세 개의 새순이 돋아난 것이다. 그중 한 촉은 제법 잎의 모양새를 갖추더니, 지금은 다시 무성하게 자라 다음 꽃을 준비하고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길어 올린 그 생명력이 하도 대견하여, ‘신통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지경이다. 요즘 나는 햇살을 받아먹으며 살이 오르는 난초 곁에 앉아 차를 마신다. 하루 중 가장 평화롭고 충만한 시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상쾌한 오후 바람을 타고 동료가 내 자리로 찾아왔다. “나 이번에 새 차 뽑았어.” 그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휴대전화 속 사진을 내밀었다. 요즘 인기 절정이라 1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는 모델인데, 운 좋게 두 달 만에 받게 됐다며 자랑이 늘어졌다. 설명은 마치 자동차 광고 내레이션처럼 유창했다. 요철을 부드럽게 넘는 승차감, 주행 중 소음을 완벽히 차단하는 정숙성, 코너를 돌 때 네 바퀴가 유기적으로 움직여 곡선을 그리는 첨단 기술까지. 뿌듯함과 기대감으로 환하게 빛나는 그의 얼굴은 행복 그 자체였다.
그가 자리를 뜨고 난 뒤,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 엉뚱한 상념에 잠겼다. 행복에도 가격표를 매길 수 있을까?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최신형 자동차와 공짜로 얻은 난초 화분 하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값진 행복을 안겨줄까? 아니, 가격이 아니라 무게를 잰다면, 행복의 양팔저울은 과연 어느 쪽으로 기울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사람마다 행복을 계량하는 눈금이 다르니까. 누군가에게는 고급 세단이 삶을 빛나게 하는 트로피일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창가의 난초 한 포기가 하루의 온도를 바꾸는 따스한 햇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행복은 반드시 ‘많은 소유’나 ‘비싼 가격’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차 문을 열 때 느끼는 강렬한 도파민의 크기라면 자동차가 앞설지 모른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행복,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기쁨이라면 나는 난초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자동차는 출고되는 순간부터 낡아가는 ‘소모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광택은 바래고 설렘도 무뎌진다. 반면 난초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해마다 새 잎을 내고 꽃을 틔우며,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짐으로써 우리에게 매번 새로운 기적을 보여주지 않는가.
행복은 결코 돈의 크기로 줄 세울 수 없다. 그렇다고 동료의 행복을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다. 다만 그가 자동차가 주는 안락함에만 머무르지 않고, 훗날 창가에서 피어나는 작은 생명과 눈을 맞추며, 난(蘭)이 건네는 고요한 위로까지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평소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누가복음 12장 15절)”라는 성경 구절을 좋아한다. 그리고 가끔은 내 식대로 바꿔 읽곤 한다. “사람의 행복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행복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것들에서 어떤 기쁨을 발견하느냐의 문제다. 발견하지 못한 행복은 없는 것과 같고, 작더라도 발견된 행복은 우주만큼 크다.
오늘도 나는 창가에 앉아 난초를 바라본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행복이 이미 저 푸른 잎맥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많이 가지지 않아도, 멀리 떠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내 곁의 작은 생명이 내게 충분한 기쁨을 건네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