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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 잠수함 Sep 08. 2023

박제(剝製)된 말

 올 장맛비는 자못 기세등등하다. 기상청은 오늘도 호우주의보를 내리고 안전을 당부했다. 정오가 가까워 오자 굵은 빗살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하늘이 먹빛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고는 마치 세상을 물로 심판하려는 듯 미친 듯이 억수를 토해냈다. 그러나 제아무리 사나운 비라도 예보된 비가 주는 충격은 제한적이다. 나름 대비하고 마음의 근력도 키워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에는 예보가 없다.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일이 크든 작든 닥쳐 봐야 알게 되는 것이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뇌졸중은 오십을 앞둔 아버지를 와르르 무너뜨렸다. 오만과 자만으로 건강을 돌보지 않은 결과는 참혹했다. 오른쪽 수족을 못 쓰게 된 것은 물론이고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 어눌해졌다. 나는 수족을 잃은 아버지보다 말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더욱 비참했다. 이전에도 아버지와의 대화는 인적 없는 국밥집에 손님 찾아들드문드문했었으나 그마저도 영영 끊기고 말았다. 아버지는 막힌 뇌신경이 새로 빚어낸 언어를 사용했지만 나는  뜻을 도무지 어림잡을 수 없었다. 예전 과묵했던 모습과 달리 아버지는 내게 자꾸 무슨 말을 하려 . 하지만 단어 몇 개를 더듬더듬 나열하는 듯하다가 언제나 긴 한숨으로 문장을 끝맺고 말았다. 아버지가 떠난 후 생각했다.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처럼 뒤섞여 버린 자모음들을 어떻게든 한 조각 한 조각 맞춰 내게 들려주려고 했던, 그러나 끝내 들려주지 못했던 그 말이 무엇이었을까를.


 나는 그 말을 너무 싱겁게 찾아냈다. ‘부탁한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 세 단어였을 것이었다. '부탁한다.'라는 말로 홀로 남겨질 아내를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 가야 당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웠을 테니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십 년 넘게 병수발한 가족들에 대한 아비로서의 도리라 여겼을 것이고.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 아버지는 내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어림쳐 보건대 삼대독자로 태어난 아버지가 할머니(내게는 증조모) 손에서 으니 사랑받을 줄만 알았지 주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그러니 죽기 전에라도 꼭 한 번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모든 것은 내 상상이고 추측일 뿐, 나는 아버지에게 그 어떤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보내고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됐다. 아버지도 내게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으리란 것을. 그 말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부탁한다.' 했느니 '걱정 마세요.'라는 말을, '미안하다.' 했으니 '괜찮아요.'라는 말을, '사랑한다.' 했으니 '사랑해요.'라는 말을 아들에게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도 그 말을 끝내 듣지 못했다.


 말에는 담아 놓아야 할 말과 꺼내 놓아야 할 말이 있다. 담아 놓아야 할 말을 꺼내 놓거나 꺼내 놓아야 할 말을 담아 놓으면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 아버지도 나도 꺼내 놓아야 할 말을 담아 놓는 바람에 후회를 넘어 뼈아픈 회한(悔恨)을 남긴 인생이 되고 말았다. 마음속에 담아 둔 말을 언제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말할 수 없는 때가 언제든 올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사무치는 한(恨)을 가슴팍에 화인(火印)처럼 새기고 만 것이다. 


 엊저녁에 부고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 그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을 그를 생각한다. 내 언어가 가난한 탓에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을 위로해 줄 말을 찾지 못하겠다. 대신 그에게 내 가슴에 박제된 채로 남아 있는 말을 내어주고 싶다.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 '사랑해요.'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배웅해야 하는 그에게 절실한 말이 아닐까. 물론 박제(剝製)된 말이니 생명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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