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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 잠수함 Nov 29. 2023

인생 검진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ㅇㅇ건강협회'를 찾아갔다. 접수 후, 짧은 상담에 이어 문진표 작성이 끝나자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진 물건처럼 갖가지 검사가 순서대로 진행됐다. 그런데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각 검사장마다 정체가 심해 대기시간이 길었다. 채혈과 소변검사를 하는 곳엔 대기실의 빈 의자를 찾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로 꽉 차서 번호표를 뽑아 들고 차례가 오기까지 한참 기다려야만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휴대폰으로 무료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고지식하게도 로커룸에 휴대폰까지 넣어둔 터라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별 수 없이 뭐 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웬 젊은 남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웠더니만 사랑싸움이었던지 금방 까르르 웃는 바람에 다시 지루해졌다.  


  따분함에서 벗어나게 해 줄 만한 것이 없나 하고 연신 둘레둘레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인생은 아름다워'란 이탈리아 영화였다. 시골 촌뜨기 귀도는 초등학교 교사인 도라를 만나 아들 조슈에를 낳아 키우며 행복하게 살게 된다. 그러나 2차 대전 후반, 그들은 나치에 의해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옷과 가방을 비롯한 모든 소지품을 빼앗긴다. 그러고는 달랑 세로 줄무늬가 그려진 옷 한 벌만 입고 생활하게 된다. 조슈아의 동심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귀도의 눈물겨운 노력과 서러운 웃음이 애잔했던 영화다.


  그런데 머릿속에 오른 것은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이 아니라 그 세로 줄무늬 이었다. 검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죄다 그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몸에서 시계, 반지, 팔지, 목걸이 따위떼어 내고 세로 줄무늬 검진복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수용소에 갇힌, 영락없는 유태인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을 이름이 아니라 수인 번호를 부르듯 숫자불러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모두가 순한 양이 된 것처럼 검사요원들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신병교육대에 재입소한 듯 눈에  만한 행동이나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럼에도 상담실로 들어가야 할 것을 혈압 검사실로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무척이나 남사스러웠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검진표를 들고 나처럼 허둥대는 사람이 꽤 눈에 띄었다. 사람에게서 이름을 떼고 번호를 붙여 놓으렇게 되나 보다 싶었다.


  졸지에 이름을 잃어버리고 대기번호 표시등에 자신의 번호가 깜박이길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장자의 가르침을 생각했다. 장자의 소요유 편에는 요임금과 은자 허유의 이야기가 나온다.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물려주려 하자 허유는 허울뿐인 임금이라는 이름을 갖는 것이 싫다며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이름은 손님과 같은 것이라 언제든지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인다. 뱁새가 둥지를 틀기 위해서는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신다 해도 제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고.


  꼬박꼬박 건강검진을 하며 구석구석까지 건강을 지킨다 해도 그날은 반드시 온다. 한 벌의 환자복마저 버거워질 날 말이다. 날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라도 어떻게 살면 안 될지는 알 것 같다. 언제 떨어질 줄 모르는 알량한 이름(명성)을 뽐내며 목을 뻣뻣하게 세우면 안 될 일이다. 더욱이 그 이름(명성)을 얻기 위해 과욕을 부리며 정작 소중한 사람을 잊고, 보배로운 시간을 잃고 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짧고, 곧 지나가지 않던가?


  건강검진하러 갔다가 인생검진하고 왔다.




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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