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율의 틈바구니에서 만난 문장의 위로
우리 아파트에 관리소장이 새로 부임한 뒤로, 단지에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녹슬어가던 자전거 보관소는 밝은 페인트 옷을 입어 화사해졌고, 잡초가 무성하던 놀이터는 말끔히 정비되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되찾았다. 울퉁불퉁하던 단지 내 도로까지 포장을 마치니, 20년 가까이 된 낡은 아파트가 마치 회춘이라도 한 듯 생기가 돌았다.
그 눈에 띄는 변화들도 반가웠지만, 정작 내 마음을 흔든 건 따로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엘리베이터 안 광고판에 시(詩)가 한 편씩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유치환의 〈행복〉,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한용운의 〈복종〉…. 문학 시간에나 읊조렸던 친근한 시들이 날마다 새로운 표정으로 찾아와 내 마음을 두드렸다.
‘마트 30% 할인’, ‘치과 임플란트 이벤트’, ‘헬스클럽 1개월 무료’ 같은 노골적인 상업 광고들을 밀어내고 당당히 들어선 시 한 편. 그것은 마치 시멘트 바닥을 뚫고 불쑥 피어난 민들레 한 송이처럼 경이로웠다.
문학이 경제를 밀어낸 장면이랄까. 자본의 최전선인 광고판 한가운데 우뚝 선 그 풍경이 낯설면서도 뭉클했다. 나는 마치 오래전 헤어진 옛 친구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듯, 오르내릴 때마다 그 문장들을 찬찬히 뜯어보게 되었다.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 관리소장으로 왔다는 사실에 내심 흐뭇했으나, 한편으론 묘한 걱정도 앞섰다. 나는 시를 좋아하니 반갑지만, 세상엔 취향도 관심사도 제각각 아닌가. 누군가 “관리비 들여서 왜 쓸데없는 걸 붙이느냐”라고 항의라도 한다면, 이제 막 뿌리내린 저 시들이 뽑혀 나갈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수줍게, 그러나 단단히 붙어 있다. 매일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라는 밀실에서, 시는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억지로 마음을 세우지 않아도 저절로 읽히고, 읽는 순간 어느새 마음이 촉촉해진다. 하루쯤 바쁜 걸음을 멈추고 시 한 줄에 걸려 넘어지는 일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요즘 새삼 느낀다.
이런 의외의 만남은 며칠 전, 집 안 식탁 위에서도 이어졌다. 휴가차 집에 온 막내딸이 그 이름도 묘한 ‘엽떡’이 먹고 싶다기에 배달 주문을 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도착한 배달 봉투를 여는데, 붉은 떡볶이 용기 위에 붙은 작은 메모 하나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당신의 오늘이 매운 일들로 얼얼했다면, 이 떡볶이가 작은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순간, ‘엽떡’이라는 자극적인 이름이 다르게 보였다. 그들은 단순히 매운 음식을 파는 장사꾼이 아니라, 한 끼 식사를 통해 타인의 고단함을 다독여주는 시인처럼 느껴졌다. 상술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짧은 문장이 전해준 울림은 의외로 깊고 맵싸했다. 그래서인지 그날은 평소보다 젓가락질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이처럼 시는 도서관에만 갇혀 있지 않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배달 음식 뚜껑 위에도, 심지어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벽면에서도 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언젠가 그곳에서 마주쳤던 문장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 당신이 힘든 건, 조금 더 나아질 준비를 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썼는지도 모를 그 문장이, 그날따라 꽉 막힌 귀성길의 피로를 씻겨주었다. 누군가의 등을 토닥이고, 축 처진 어깨를 쓸어주는 말. 그것이 결국 시의 참모습이 아닐까.
현대 사회는 채찍질하듯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문한다. ‘더 벌어야 한다, 더 사야 한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그 소란 속에서 우리는 가끔 잊고 산다. ‘더 느끼고, 더 나누고, 잠시 머물러야 한다’는 소중한 사실을.
문학은, 그리고 시는 삶의 균형추다. 자극적인 소비 대신 잔잔한 사유를 권하고, 속도를 부추기기보다 멈춤의 가치를 일깨운다. 시 한 편이 놓인 아파트 광고판, 따뜻한 문장이 적힌 배달 스티커 하나가 팍팍한 우리 삶의 결을 부드럽게 바꿔 놓는다.
물질이 전부인 시대라지만, 때로는 시 한 줄이 밥 한 끼만큼의 든든한 위로가 된다. 시가 머무는 곳에, 마음도 멈춘다. 그런 공간이 많아질수록 숨 가쁜 일상에도 ‘여유’라는 숨구멍이 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틈에서, 삶은 비로소 숨을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