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새해, 내가 하지 않기로 한 딱 한 가지
새해를 앞둔 이맘때면 서점 매대에 다이어리가 수북이 쌓인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첫 페이지에 ‘무엇을 더 할 것인가’를 적어 넣느라 분주하다. 더 일찍 일어나기, 더 많이 걷기, 더 치열하게 살기. 마치 지난 한 해의 후회를 ‘더하기’라는 말로 메우려는 듯하다.
하지만 다가오는 2026년, 나는 조금 다른 목록을 적어보려 한다. 무엇을 더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낼지에 대한 기록. 바로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다짐이다. 며칠 전 아내가 건넨 가죽 벨트 하나가 그 답을 넌지시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견고한 상자를 열자 은은한 가죽 향이 코끝에 번졌다. 바지 고리에 끼워 보니 부드럽게 감기는 감촉이 제법 근사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버클을 채우고도 벨트 끝이 한참이나 남았다. 누구에게나 맞도록 넉넉하게 나온 기성품인 탓이겠지만, 그대로 차기엔 내 허리에 지나치게 길었다.
서랍에서 가위를 꺼냈다. 한 번 자르면 되돌릴 수 없기에 가죽에 날을 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허리에 둘러보고, 길이를 가늠하고, 다시 조금씩 끝을 잘라내기를 반복하는 시간. 마침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내 허리에 꼭 맞는 단정한 원(圓)이 완성되었다.
발치에 떨어진 가죽 조각을 집어 들었다. 쓰레기통으로 향하던 손이 멈칫했다. 조금 전까지 내 허리를 감싸던, 윤기 나는 가죽이 아니던가.
"아깝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도 ‘쓰임’보다 ‘재료’에 마음을 빼앗긴 탓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가죽이라도 내 허리를 두 번 감을 수는 없다. 아깝다고 자르지 않은 채 질질 끌고 다닌다면, 그것은 멋이 아니라 짐이 된다. 나를 단단히 붙들어줄 정도, 딱 그만큼이면 충분하다. 그 너머는 모두 ‘군더더기’다.
잘려 나간 가죽 조각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내 글쓰기를 돌아보았다. 감사하게도 최근 팔천 명 넘는 분들이 내 글에 머물러주셨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관심 앞에서 얼떨떨함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무게가 가슴 한편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더 잘 써야 한다는 욕심’이었다.
‘더 세련되게 써야 해.’
‘더 그럴듯한 문장을 골라야 하지 않을까.’
유독 글쓰기라는 영역에만 들어서면 내 안의 욕심은 잡초처럼 무성해진다. 타인의 매끈한 문장과 내 투박한 글을 견주며 습관처럼 나를 깎아내렸다. 그것은 마치 내 허리보다 훨씬 긴 ‘남의 벨트’를 탐내느라, 정작 내게 꼭 맞는 ‘나만의 벨트’를 하찮게 여기는 치기(稚氣)와 다르지 않았다.
남의 문장이 아무리 화려한들, 내 삶의 둘레를 정직하게 조여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일까. 나는 그동안 맞지 않는 기준을 억지로 껴입은 채,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혼자 숨이 가빴던 건 아닌지.
가위가 질긴 가죽을 파고들던 감각을 떠올려 본다. 손끝에 전해지던 저항, 조각이 떨어져 나가던 순간의 개운함. 무언가를 더하지 않고, 오히려 잘라냄으로써 비로소 분명해지던 그 순간을.
문득 평생 렌즈를 깎으며 진리를 사유했던 스피노자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두꺼운 유리 덩이를 깎고 또 갈아내어 세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얇은 렌즈를 만들듯, 그가 좁은 방에서 묵묵히 행했던 일은 결국 본질을 가리는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명예나 욕망 같은 불투명한 것들을 갈아낸 뒤에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삶의 본질, 그 투명한 ‘자유’를 그는 렌즈 속에서 보았으리라.
다시 가죽 조각을 본다. 이 조각은 내 몸에 맞는 벨트를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 덜어냄’의 흔적이다. 내가 오늘 써 내려간 서툰 문장들, 남과 비교하며 앓았던 자괴감도 사실은 잘라내야 할 가죽 조각과 같은 것이리라. 진실한 문장은 화려한 수식어를 덧붙일 때가 아니라, 나에게 맞지 않는 욕심을 도려낼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망설임 없이 가죽 조각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질긴 미련 대신 묘한 확신이 남는다. 명품관의 진열품처럼 눈부시지는 않더라도, 오늘 내 마음의 둘레를 정직하게 감싸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품격이란 더하는 데에 있지 않고, 더는 뺄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래서 정했다.
2026년 새해, 내가 하지 않기로 한 딱 한 가지.
‘나를 남의 기준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
모니터의 커서가 다시 깜빡인다. 숨을 고르고 잡초처럼 돋아난 욕심을 한 줄씩 솎아낸다.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내 호흡에 맞는 문장의 길이를 가늠해 본다. 오늘 내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줄 글은, 딱 이만큼이면 족하다.
매주 목요일 아침, 인사드리겠습니다.
독자님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할게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미지 출처 : 노란 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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