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울어진 집이다

- 삐걱거리는 몸으로 다시 쓴 생(生)의 건축학

by 노란 잠수함

붕괴는 예고 없이, 늘 왼쪽에서 시작됐다.

내 몸의 균형은 오래전에 무너졌다. 고장 난 부위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왼쪽으로 쏠려 있다. 선천적 유약함과 후천적 부주의가 빚어낸 합작품이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정직한 청구서를 내민다. 야속하게도 그 독촉장은 어김없이 내 몸의 좌측 우편함으로만 배달된다.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통증의 진원지는 언제나 왼쪽이었다. 운동장 축구 골대 앞에서 넘어질 때 가장 먼저 땅을 짚어 금이 간 것도 왼쪽 손목이었고, 달리기 시합 도중 넘어져 수술대에 올려야 했던 팔꿈치도 왼쪽이었다. 깁스를 푼 앙상한 팔을 보며, 나는 내 몸이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어가는 집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월이 흐르며 상실의 목록은 더욱 촘촘해졌다. 노안보다 먼저 흐릿해진 시력, 밤잠을 설치게 한 오십견, 기계음 속에서 이별한 어금니까지 모두 왼쪽의 기록이다. 샤워 후 거울 앞에 서면, 기흉 수술 흉터가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음각처럼 선명하다. 그것은 이 집이 무너지지 않게 박은 낡은 쐐기 같기도 하고, 위태로운 삶을 경고하는 낙인 같기도 하다. 요즘은 스마트폰을 받치는 왼손 엄지마저 시위하듯 욱신거린다.


왼쪽이 이렇게 허술하다 보니 가끔 이유 없는 공포가 엄습한다. 하필이면 생의 엔진인 심장이 그 위태로운 왼편에 있기 때문이다. 새벽 3시, 적막한 시간. 왼쪽 가슴이 쿡쿡 쑤시면 덜컥 겁이 난다. 혹시 멈춤의 신호일까. ‘늑간신경통’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심장에는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불안은 늘 이성보다 한발 앞서 도착한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다. 손바닥 아래 규칙적인 박동, 쿵, 쿵. 그 진동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쉰다. 살아 있다는 감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아픈 곳에서 선명하게 확인된다.


그렇다고 오른쪽이 무쇠처럼 단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덜 약할 뿐이다. 왼쪽이 약하니 오른쪽은 늘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내 몸의 균형은 오른쪽의 희생으로 유지되어 왔다. 약점이 분명한 왼쪽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하중을 반대편에 실었다. 무거운 가방을 드는 일도, 문고리를 돌리는 일도, 계단을 오를 때 더 힘을 쓰는 일도 늘 오른쪽의 몫이었다. 그러니 오른쪽이 더 단단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 몸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을 충실히 입증해 왔다. 자주 쓰는 쪽은 발달했고, 쓰이지 않은 쪽은 보호받는 대신 약해졌다. 비대칭은 어느새 습관이 되었고, 습관은 마침내 내 몸의 고유한 건축 양식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이 기울어짐의 법칙은 육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내 삶의 무게중심 역시 늘 한쪽으로 위태롭게 쏠려 있었다. 마음의 근육도 몸의 경로를 그대로 따랐다. 나는 나의 여린 속살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반대편 페르소나를 과하게 단련하며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울고 싶어도 입술을 꽉 깨물었고, 힘들다는 말은 목구멍 안으로 꾹 눌러 담았다.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기보다 스스로 짐을 졌다. 그러다 보니 책임감이라는 근육은 기형적으로 비대해졌지만, 의존하고 위로받는 감정은 점점 왜소해졌다. 부탁하기보다 직접 해결하는 쪽이 편했고, 아픔을 드러내기보다 괜찮은 척 웃어넘기는 일이 익숙해졌다. 그렇게 반복된 태도들은 갑옷처럼 나를 지탱했지만, 쓰이지 않은 감정들은 한쪽에 방치된 채 끝내 자라지 못했다.


나는 원래 강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버텨야 했기에 그 부분만 유난히 발달했을 뿐이다. 약함을 숨기는 법, 무너진 표정을 감추는 법, 울음을 삼키는 법. 그런 기술들을 오래 연습하다 보니 그것들이 마치 나의 본성처럼 굳어버렸다. 삶도 몸처럼 자주 쓰는 쪽으로만 길이 났다.


나는 여전히 약골이고, 지금도 비대칭인 채로 살아간다. 그렇다고 이제 와 억지로 균형을 바로잡으려 애쓸 생각은 없다. 삶의 균형이란 반드시 수평을 맞추는 일이 아니라, 기울어진 상태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무게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믿기 때문이다. 피사의 사탑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기울어짐 속에서 중력을 버텨온 긴장감 때문이 아니던가. 완벽한 대칭은 박물관에 박제된 조각상에나 존재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조금씩 기울어져 있다. 바람에 맞서기 위해, 햇볕을 더 받기 위해, 혹은 누군가에게 기대기 위해 우리는 비스듬한 자세를 취한다. 그러니 나의 기울어짐은 수치가 아니라 치열한 생존의 증명이다.

나는 앞으로도 비스듬히 기운 집으로 남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 낡은 창틀이 흔들리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겠지만, 그 소리마저 내 삶이 연주하는 불협화음이라 여기려 한다. 나의 기울어짐이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나를 설명하는 유일한 양식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도 나는 왼쪽으로 기운 채, 오른쪽으로 단단히 땅을 딛고 선다. 이 불안한 각도야말로 내가 세상과 마주하며 균형을 유지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이 기울어짐 속에서 나는 비로소 온전해진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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