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강이 풀리는 시간

- 어머니의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by 노란 잠수함

낡은 미닫이문을 밀었다. 비릿한 생선 내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열기가 훅 끼쳤다. 내가 앞장서고 노모가 뒤따랐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눌어붙은 유리창으로 겨울 볕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동태전골로 소문난 집답게 대낮부터 소주병을 비트는 사내들의 수선스러운 농지거리가 뿌연 수증기 사이로 어지럽게 오갔다.

냄비 속 탕이 끓기 시작했다. 무와 미나리 사이에서 꽁꽁 얼었던 몸을 녹이는 저 생선. 동해 푸른 물에서 유영하다 그물에 걸려, 거친 뱃사람과 장사꾼의 손을 거쳐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냉동고 깊은 어둠 속에서 돌처럼 굳은 채로 빛을 기다렸던 놈이, 이제야 뜨거운 국물 속에서 굽이진 생의 마지막 매듭을 풀고 있었다.

냄비 건너편, 노모의 얼굴이 허연 수증기 속에 연신 사라졌다 나타났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지난 삶도 냄비 속 저것과 다르지 않았다. 연거푸 김을 피워내는 냄비 위로 물정 모르던 앳된 그녀의 얼굴이 아스라이 어른거렸다.

열여덟 처녀는 사진 속 미남자가 서울에서 양복점을 한다는 숙부의 말을 믿었다. 석류꽃 붉게 터지던 날 선을 보고, 그해 동짓달에 식을 올렸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남편이 허우대만 멀쩡한 백수건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허망하게 끝났다. 서울을 등지고 친정보다 더한 오지로 내려온 그녀를 기다린 것은 시할머니의 서슬 퍼런 시집살이였다.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재가한 시어머니 대신, 덩그러니 남은 손주를 키워낸 사람이 시할머니였다.

마음 놓고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는 그 캄캄한 그늘 아래서 자식 둘을 낳아 길렀다. 둘째가 태어나고 얼마나 지났을까. 남편의 성화에 시달린 시할머니가 마지못해 땅을 내주었다. 밑천을 손에 쥔 남편을 따라 다시 서울로 올라갈 때만 해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가진 돈을 모두 쏟아부은 금은방은 일 년도 채 버티지 못했다. 더구나 입에 겨우 풀칠해 주던 학교 앞 문방구마저 접어야 했다. 남편이 어렵게 들어간 방직회사에서 쫓겨나면서 살림살이는 채반 위 무말랭이처럼 쪼그라들었다. 어떻게든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남의 식당 주방을 전전해야 했던 그 시절부터 그녀는 서서히 얼어붙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악착같이 버텨 막내까지 시집보내고 한숨 돌리나 싶었을 때, 남편이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오십을 앞둔 그녀의 어깨 위로 남편의 무거운 몸이 내려앉았다. 기약 없는 병수발을 홀로 떠안았다. 그녀가 대소변을 받아내는 동안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감정들은 맥없이 한 마리 동태처럼 굳어갔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야만 버틸 수 있는 날들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늙고 병든 육신과 산동네 전세 보증금 몇 푼이 전부였다.

돌이켜보면 남편이 쓰러진 뒤부터 그 지독한 것이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술이었다. 얼어버린 감정을 녹이려 들이붓던 독주가 오히려 그녀를 파멸로 몰고 갔다. 남편이 떠난 후 증세는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다. 술에 절어 있는 어머니를 보는 것은 자식들에게 끔찍한 형벌이었다. 결국, 길바닥에 쓰러져 수술을 받은 뒤, 요양병원에 들어가고 나서야 간신히 술에서 놓여났다. 물론 의지로 끊어낸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야 겨우 허락받은 불안한 유예였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도록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길을 찾아내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거처를 옮기는 것 외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고심 끝에 찾아낸 곳이 강원도 영월이었다. 산 좋고 물 맑은 그곳에 마지막 실오리 같은 희망을 걸었다.


죽음의 고비를 한 번 넘긴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그곳의 바람과 흙이 얼어붙은 가슴을 어루만져서였을까. 영월의 어머니는 서서히 자신을 해동시키기 시작했다. 술 냄새 대신 흙냄새를 묻히고 다니며 매일 걷기 운동을 했고, 타고난 친화력으로 노인정의 인기 스타가 되었다. 단순한 기적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꽝꽝 얼려두었던 감정에 온기를 불어넣어, 가슴속 응어리를 녹여내며 소생한 것이었다.

"국물 쫄아든다. 얼른 묵어라.“

어머니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전골냄비는 바닥을 드러내고 동태 대가리가 삐죽 솟아 있었다. 가스 밸브를 줄이자 수증기가 가라앉으며 맞은편에 앉은 노모의 얼굴이 또렷이 드러났다. 그 주름진 얼굴 너머에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신을 꽁꽁 얼리며 시린 강을 건너온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가난한 집 아홉 남매 중 장녀가 아니라 유복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났더라면 인생이 지금과는 달라졌을까. 부질없는 상상이 뜨거운 국물 위로 피어올랐다가 이내 흩어졌다.

잘 익은 동태 살을 발라 밥 위에 올려 드린다. 어머니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내 밥그릇으로 살점을 되돌려 놓는다. 마디마디 불거진 손. 굴곡진 인생이었다. 그 모진 세월을 건너왔기에 이렇게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파국을 맞을 수도 있었던 모자의 연을 끝내 다시 이어준 노모를 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는다.

푹 익은 무 한 조각이 혀끝에서 부드럽게 무너졌다. 맵고 짰던 어머니의 지난 세월이 입안 가득 번졌다. 나는 그 뜨거운 생을 천천히 넘겼다. 그것은 한 여자가 온몸으로 막아낸 그 시린 겨울을 내 안에 들여와 비로소 녹여내는 일이었다. 속이 뜨거워졌다. 그제야 어머니와 나 사이에 얼어붙어 있던 침묵의 강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바닥이 드러난 냄비 안에 겨울 햇살이 듬뿍 담겼다.

봄이 머지않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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