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선장이라 불러준 아이들

- 풋내기 선장과 섬마을 아이들의 뜨거운 항해

by 노란 잠수함

비닐봉지를 뒤엎자 싱크대 안으로 갇혀 있던 바다가 왈칵 쏟아졌다. 외출했다 돌아온 아내가 '당신이 좋아하는 거'라며 건넨 홍합. 찬물에 바락바락 씻어 냄비에 쏟아붓고 센 불에 올렸다. 이내 우르르 한소끔 끓어오르자 주황빛 속살을 내민다. 허연 김을 피워내는 냄비 앞에서 기억은 아득히 먼 시간을 거스른 후에야 비로소 닻을 내렸다.


첫 발령지는 고금종고였다. 고금도는 강진 마량항에서 철선으로 십 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엄연히 바다에 뜬 섬이었다. 나이 지긋한 선배 교사들 틈에 낀, 이제 막 교단에 들어선 스물여섯의 총각 선생은 연둣빛 새싹처럼 유독 눈에 띄었으리라. 섬 아이들에게 나는 펄떡이는 ‘젊음’ 하나만으로 호기심의 대상이지 않았을까.


섬을 떠나기 전, 2학년 3반 마흔두 명 아이들과 함께했다. 평생 바다를 곁에 두고 자란 녀석들은 나를 ‘선생님’ 대신 ‘선장’이라 불렀다. 선장. 한 배에 오른 이들의 운명을 쥐고 거센 풍랑을 헤쳐나가야 하는 막중한 자리. 하지만 교단 3년 차 햇병아리 교사를 향한 아이들의 맹목적인 지지는 내게 부담보다 오히려 열정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아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냈다.


그 응집된 힘은 가을 체육대회 줄다리기에서 폭발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다른 반에 비해 유독 체격이 왜소했다. 경기 전부터 승패가 빤히 보이는 전력이었지만, 죽기 살기로 밧줄에 매달린 아이들의 결기 앞에서는 항우장사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어 보였다.


우승 후보들을 차례로 고꾸라뜨리고 결승에 오르자 운동장은 발칵 뒤집혔다. 손바닥이 다 까지고 밧줄을 휘감은 팔목에 검붉은 피멍이 맺히도록 악착같이 버텨낸 끝에 마주한 분패. 아이들은 밧줄을 놓자마자 억울함에 엉엉 울었고, 나 역시 창피한 줄 모르고 흙먼지투성이인 그 작은 어깨들을 하나하나 끌어안으며 눈물을 쏟았다.


그날 이후 아이들과 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닻줄이 내려진 듯했다. 바다가 제 속을 아낌없이 내어주던 시월의 끝자락이었다. 휴일 아침,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문설주에 기대섰던 큼지막한 마대 자루가 발끝으로 툭 쓰러졌다. 주둥이를 묶은 나일론 끈을 풀어헤치자 어른 주먹만 한 자연산 홍합, 이른바 ‘섭’이 와르르 쏟아졌다. 양식 홍합과는 껍데기의 두께와 촉감부터가 다른 섭. 물이 빠질 때 쇠갈고리로 날 선 갯바위를 긁거나 거센 물살에 휩쓸릴 위험을 무릅쓰고 자맥질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귀한 조개였다.


필시 우리 반 사내 녀석 여럿이 작당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캐낸 것이 틀림없었다. 짠물에 퉁퉁 불어 터진 손가락과 갯바위에 긁힌 생채기를 훈장인 양 달고서 히죽거렸을 아이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관사 이웃들에게 큰 인심을 쓰고도 며칠간 내 몸에 갯내가 밸 만큼 끓여 먹었으나 물리지 않았다. 누구의 소행인지 끝내 밝혀낼 수 없었지만, 그 섭 자루는 아이들의 여린 손길로 꾹꾹 눌러 담은 순박한 사랑의 증표임이 분명했다.

섬을 떠나던 날, 제각기 ‘행복하게 살라’는 뜻의 응원이 적힌 쪽지를 꼬깃꼬깃 접어 유리병에 한데 담아 내밀며 자신들의 영원한 선장이 되어 달라 울먹이던 아이들. 부족하고 서툴렀던 나를 왜 그토록 믿고 좋아해 주었을까.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의 고개를 넘고 있을 너희들의 항해는 지금 평안한지. 부디 모진 풍랑을 잘 헤쳐왔기를. 그리고 남은 삶의 굽이에서 거센 파도를 맞닥뜨리더라도 밧줄을 쥐고 버티던 그날의 투혼으로 꿋꿋이 이겨내 주기를. 비록 너희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선장으로 남지는 못했으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애썼다. 그 모두가 풋내기 교사의 움츠린 가슴에 너희들이 달아준 ‘선장’이라는 벅찬 이름표 덕분이었단다.

불을 끄고 그릇에 홍합을 수북이 담아낸다. 고금도의 옛 바다가 식탁 위에서 되살아난다. 상처투성이 손을 등 뒤로 감춘 채, 섭 자루를 문설주에 기대 놓고 달아났던 녀석들의 가쁜 숨소리가 귓가에 들릴 것만 같다. 나를 선장이라 불러준 녀석들. 오늘따라 그 마흔두 명 아이들이 사무치게 그리운 저녁이다.







이미지 출처 : 노란 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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