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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h Feb 27. 2017

너무나도 허약한 인간의 육체와 의식

각자 사는것에 힘겨워하는 인간들...


오랜만에 친구가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대학로를 나갔다. 내 생각에 경제적으로 납득이 가지않는 상황에 처한듯해 혹시 사기나 당한게 아닐까 걱정하면서 그 내막을 듣기 위해서이다. 나름 탄탄한 중견기업의 임원직으로 남부럽지 않은 연봉에 누가 찾아가던 호기있게 밥과술을 사던 친구 였는지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해물이 들어간 배트남 쌀국수를 먹고 장시간 커피와 흡연을 하며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기암 이면서도 멀쩡하게 눈앞에 있는 나를 신기해 하는 친구는 자신이 처한 어려운 사정들을 털어 놓는데 어쩌다 그리 됐는지 안쓰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네명의 자녀를 키우며 첫째의 미국 유학비용 그리고 막내의 선천적 질병으로 들어가는 막대한 치료비가 중산층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수있는 친구를 경제적으로 목을 죄게 만든 원인이다. 친구 막내의 상태가 마치 나 어린시절과 판박이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멈추질 않는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각자의 처한 환경에 따라 다들 사는것 자체가 '고뇌' 인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죽음을 걱정해야 하는 내 상황에 다른 사람 걱정하고 신경쓸 처지가 아닌데 어쩌다 남 걱정 들어주고 카운셀러 역활을 해야하는 상황이 된건지, 그렇다고 내가 도와줄수 있는 상황도 아닌지라 화도나고 답답했다.



자정이 다돼서 집에 오면서 병마에 고통받고 시달리는 인간종에 대해 답답하고 화가나 운전하면서 혼잣말이 계속 나온다.


"인간은 너무나도 허약한 존재이다.. 너무나도 허약해"


내 생각에 인간은 육체적으로도 너무나 허약하고 의식적으로도 너무나 허약한 존재들이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내 기준으로는 별것도 아닌것으로도 육체는 쉽게 죽고 고통받으며 의식은 무너져 내린다. 나의 경우는 어린시절에 이미한번 죽음에서 스스로 육체를 복원시킨 경험이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암도 내가 이 악물고 게으르지 않고 육체와의 소통을 통해 몸이 원하는대로 실천만 하면 충분히 복원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다.


요즘들어 여기저기서  '너 괜찮니?' 물어보고 자기몸 아프다고 나에게 하소연 하는사람들 천지인데 대부분 자기에게 찾아 오라고 하므로 누가 더 심각한지 한번 따져볼까 라는 말이 목구멍 까지 나오다 참게된다. 아직까진 내가 움직이며 사람 만나고 다닐 처지는 아니다.


이런말 하면 암으로 투병하며 고통받는 다른 환자들에게 좀 미안한 말이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내입장 에서는 5cm 정도의 암세포에도 죽네사네 하며 난리치는게 엄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어이없게도 그 정도에 고통받다 죽는경우가 대부분이다.


객관적으로 눈으로 드러난 병원 진단과 증거들만 따져도 나의 경우는 몸속이 거대한 암세포 ( 의사말로는 축구공 만한) 로 뒤덮혀 수술도 불가하고 장폐색을 매시간 걱정해야 하는데다 의학적으로는 반시체나 마찬가지 이므로 나보다 심각한 상태의 환자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이미 나는 의학적으로 진단 당시에 6개월 시한부 사형선고를 받았고 현재로선 그 시간을 훨씬 넘기고 여유분으로 살고있는 중이다. 그런 나에겐 왼만한 병들은 비록 당사자들에겐 참을수 없는 고통임을 알면서도 죄송하지만 엄살로 느껴지는게 당연하다.


처음 암 진단받고 암에대해 알고자 암카페등을 찾아 눈동냥을 하다보니 도저히 나와는 맞지않아서 바로 관심끊고 무시 하기로 했다. 누가 더 심각한지로 서열을 따지자면 내가 짱 먹는다고 하겠는데 나보다 훨씬 양호한 상황임에도 다들 너무나도 난리들을 치고 심각한지라 나에게 도움될만한 요소가 보이지 않아서 이다.


나는 의식적 죽음을 통해 시간을 다루는 법을 십년간에 걸쳐 터득했고 현재는 몸의 죽을고비를 몇번씩 넘겨가며 죽음을 통제 하는법을 배워나가는 중이다. 일단, 방법을 알고나면 별것도 아닌일이 된다. 죽음을 항상 옆에 끼고 살면서 내가 죽을지 살지는 내 의지로 선택할수 있다. 말기암 환자가 스스로 죽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천하의 그 어떤 명의가 와도 그 환자는 살릴수 없다.



오늘도 정상인과 다를바없이 교통체증을 감수하고 시내를 나가 외식을 하고 흡연과 커피등을 마시면서도 탈이나지 않도록 스스로 내몸을 통제하고 조절하기에 별다른 암환자의 징후없이 지낼수 있었다. 무식하게 음식을 먹고 죽을 고비를 몇번 넘기다 보니 이젠 나름 요령이 생겨 내몸의 상태를 실시간 체크할수 있는 감각도 생긴것 같다. 몸안에 들어오는 물 한잔에도 즉석에서 그것이 몸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조금씩 파악이 된다. 내가 먹을수 있는것과 먹어선 해가 되는것을 남의말 듣는것이 아닌 스스로 몸으로 느끼며 가려낼수 있다.


현재로선 거대한 암세포와 함께 정상적인 생활하는것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상생활이 돼어 버렸는데 다른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런것이 기적과 같이 보이나보다. 엄마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다고 한다.멀쩡하게 생활 하는것이 마냥 신기하고 이해가 안가나 본데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나는 의지박약으로 완전치유에 실패한 케이스 이다. 생라면이나 뜯어먹고 줄담배를 피면서 말기암환자가 낫기를 바라는건 뻔뻔한 도둑놈 심보나 다를바 없다는걸 알기에 이정도 완화된것 만으로도 감사를 드리고 있다. 정답을 알면서도 의지가 약해 실천하지 못해 실패하는것에 대해선 양심상 할말이 없다.


나의 경우, 비록, 음식관리에 관해서는 경험부족으로 실패했지만 현재, 몸의 통증을 받아들임으로 해서 육체와의 소통을 배워가고 통증을 제어하는 방법과 암세포를 길들여 정상적 생활을 유지하는법까지는 겨우 터득했다. 죽을 고비를 몇번 넘기긴 했어도 지금은 정상적 생활을 유지하는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데 다른 사람들을 보자면 그러질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암환자들이 나를 따라했다간 전부 바로 죽음과 대면할게 뻔하다. 마치 어린시절 너무나도 쉽게 죽어버리는 곤충들을 보듯 인간들이 그렇게 느껴진다.


내가 남을 동정할 입장이 결코 아님에도 왠지 안쓰러운 느낌이 들고 화가난다. 실질적으로 따지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육체적으로는 나보다 건강하다 . 그러나 나보다 쉽게 고통받고 죽어 나가는 것은 의식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와 생명력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는걸 인간들은 스스로 깨닫지를 못한다.



시간을 다루고 통제하는법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인간들은 무지하다. 남이 자신의 생각을 읽을까봐 동물들은 대부분 가능한 텔레파시 능력도 스스로 차단하는 나약한 의식들을 지녔다. 천적이 사라진 인간에게 적이란 같은 인간이기에 벌어진 현상이다. 자신의 육체에 대해 무지하기에 얼마만큼의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지를 못하며 그런 무지함이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고 별것도 아닌 병마에도 시달리다 어이없이 죽어가게 만든다.


생명력의 강함과 위대함을 믿지못하고 약물과 외부적 도움에 의존하는 나약한 의식을 버리지 않는한 인간의 육체는 별거아닌 병마에도 어이없게 죽어나가는것을 계속 반복할것이다. 원초적 생명력에 관해선 곤충과 동물보다도 허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인것이다.


내 앞가림만 신경써도 모자랄 판국이지만, 주변의 친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병마에 고통받는것을 계속 접하니 인간들의 나약한 의식에 답답하고 화가난다. 정말 이 악물고 아무렇지 않게 내가 정상인으로 돌아가는 기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나는 하루이다. 그건 기적도 아니고 누구나 지닌 인간의 육체가 가진 생명력의 위대함 이란걸 알리고 싶다.


'나를 보라' 내가 아무렇지 않게 완치돼어 병마에 시달리는 인간들에게 샘플이 되어주고 싶다. 그러기엔 내가가진 암세포가 너무 커서 복구에 장기전으로 시간이 좀 많이 걸릴거 같은것이 현재로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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