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 전투의 무모한 희생을 보며..
2만여명이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2백명 일본군에게 죽창들고 인해전술로 무식하게 돌격하다 거의 전멸한 역사가 동학운동의 ‘우금티(우금치) 전투’ 다. 우금치 전투의 패전으로 동학군은 궤멸, 동학혁명은 확실한 실패로 종결 지어졌다.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반해 정부군 3200명과 2백여명 이었던 일본군은 부상자나 사망자 제로, 전투가 아닌 일방적 민중 학살이었다.
당시의 처참했던 우금치 전투의 장면을 24부작 SBS 드라마 ‘녹두꽃(2019)’ (넷플릭스) 종영 부분에 그대로 재현해 보여준다. 연기임을 알면서도 수만명 일방적 학살장면이 너무도 원통하고 처참해 TV를 껐다가 일정시간 감정의 휴지기간을 거친후 뒤편 마무리를 이어봤다. 의협심 에만 휘말려 죽창들고 자동소총 앞에 뛰어들어 허무하게 죽어가는 수만명 민중이 일본군들에겐 게임속 좀비때나 다름없다. 일본군 살육의 놀잇감으로 수만 목숨을 그냥 쓸어서 내다버린 셈이다. 착검으로 살육의 마무리를 즐기는것에서 사람 목숨이 총알 하나만도 못하다.
“병사는 전투에서 피를 흘리며 죽고 장수는 피가 말라 죽는다.”
드라마속 전봉준의 대사다. 자신의 결단에 수만명 목숨이 달려있는 상황에서 혁명의 수장이 된 그가 짊어진 역사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라를 외인들에게 유린 당한다는 울분과 임금의 SOS에 화력의 절대적 열세를 알면서도 진격을 선택한 그의 결단에 공감은 한다.
* 그전까지 조선인들과 동학군은 자동소총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소총만을 보아왔던지라 인해전술로 충분히 이길수 있으리란 오판이 들 법도 하다.
싸우다 죽자라는 애국심과 의협심은 존중 받을만해도 정부군이 일본군과 합세한 이상 구국의 명분은 사라지고 수만의 무고한 민중의 희생과 역적의 오명만 뒤집어 썼다. 전적으로 외세앞에서 민중을 방패삼아 안위를 택한 고종의 무능함이 최종적으로 역사앞에 그 책임을 져야 마땅하겠다.
대원군과 고종은 비밀리에 전봉준에게 서찰을 보내 왕권을 마구 유린하는 일본군에 맞서 봉기해 줄것을 요청하고 임금의 뜻에 따라 전봉준은 다시 거병을 해서 죽창들고 일본군과 맞서는데 정작 정부군은 일본군과 함께 동학군 토벌에 나서니 나라가 안 망하고 배길 방도가 없다. 사형을 앞두고 그래도 임금을 지키겠다고 거병의 배후에 조선 왕실이 관여했다는 증언을 하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일본의 회유를 전봉준은 일거에 거절한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를 위해 싸우는건 무지랭이 농민들이고 관군은 일본군과 연합해 의병들을 학살하고 뒤에서 몰래 거병을 부추긴 고종은 왕비와 아버지 권력다툼 사이에서 무능과 무책임의 극치를 보인다. 치맛바람 정치로 허수아비 고종 뒤에서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맞서고 청나라 세력에 붙어 동학민중을 학살하려다 청일전쟁을 불러 일으킨 망국의 주역이 (일본에게 살해 당했단 이유만으로 애국자처럼 묘사된) 명성왕후다. 일본군이 궁궐에 난입하고 청나라 편인 왕비를 학살해도 말한마디 못하는 임금,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외세가 안방을 차지하고 주권국가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처참한 수준이 조선말기다. 방사능 오염수를 우리 바다에 들이붓고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당연한듯 떠벌려도 아무말도 못하고 도리어 일본입장을 대변하는 작금의 현실과 비슷하다.
다양한 각도에서 현실이 조선말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그때와 다른점 이라면 외세가 아닌 국민들의 자발적 선택인지라 핑계꺼리도 없다. 이 나라 국민들 이율배반적 행동에 과연 당시처럼 구국의 명분이 설지는 역사가 판별해줄테고 드라마속 과거의 인물들과 현실을 대입해보라.
https://youtu.be/ap3PBUQJMOE?si=S_Q6TIg9lyY3V2MT
반일의 선봉에 선 민중이 있다면 친일의 앞잡이를 택한 부류가 있고 임금을 비롯 다양한 캐릭터가 각자의 역활을 충실히 재현해 보여준다. 누구를 더 지지할지 현실의 선택과 드라마를 지켜보는 시청자의 행동은 상당히 이율배반적이다.
작금의 친일파를 대하는 국민수준과 현 세태를 보자면 수만 민중이 목숨을 그냥 던져버린 우금치 전투와 삼일만세 운동을 왜 했는지 그저 어이없음과 더불어 통탄을 금할수가 없다. 프랑스의 민중 대혁명이 왜 대대손손 프랑스인들의 자긍심이 되었고 그에 반해 동학은 우리 역사에 원통함의 카르마로 상처만 남겼는지 주권을 가지고도 스스로 시대를 답습하는 지금 한국의 현실이 그대로 답해주고 있다.
독립운동을 했던 의인들과 당시의 민중들 그리고 전봉준과 당시 나라를 잃은 원귀들의 한이 얼마나 원통할지 충분히 이해하나 전쟁에서 패장은 그에따른 역사적 책임을 진다. 실패한 혁명에서 역적의 오명이 그것이고 자신의 판단오류의 결단을 따른 수만명 목숨에 대한 자책감의 무게를 감당할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인내천 사상을 내세운 동학의 실패는 사상의 오류라기 보다는 자격의 미달이라 보아도 된다. 사람답게 살려면 사람의 자격이 우선 되어야만 한다. 이 나라 많은 국민들의 수준이 여전히 독립운동가들을 멸시하고 친일로 출세를 택한 친일파들과 후예들을 지도층으로 계속 떠받드는 자신들의 선택을 애국이라 우기고 또 믿는다.
우금치 전투에서 자동소총앞에 죽창들고 때로 달려드는 무모한 민중들을 비웃고 살육을 즐기며 웃는 일본군에 동조하던 당시의 양반들과 현 지지층 국민들에게 애국은 무슨 의미일까?
https://m.yna.co.kr/view/AKR20240305049900063
성공한 프랑스 민중혁명이 프랑스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 이라면 실패한 동학운동을 비웃는 친일의 자부심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자식들에게 무엇을 가르켰길래 대를 이어 매국행위를 자랑스럽다 하는짓이 또 다시 국가방침이 되고 국민들에게 따르라 강요하며 비통한 역사들을 다시 되새기는 짓들이 반복되는지..
드라마속 허구의 인물인 친일 앞잡이 이현의 마지막 행동이 곧 작가의 심정이다. 개혁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의 앞잡이가 되서 동학군 토벌에 앞장섰지만 문명국 일본이 항복을 받고 신사적으로 진압을 마치리라 오판한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으로 눈앞에서 수만명 동포가 일방적 살육당하는 현장을 지켜본 그는 일본에 속았음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수만명 민중의 목숨값으로 자신은 사또로 출세해 고향에 부임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살인자이자 매국노인 자신을 비난하는 대신 출세했다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고 아부를 하자 ‘다들 제정신인가? ’ 그 미친 상황에 양심이 폭발한다. 결국 수만 목숨을 죽게만든 자신의 매국 선택에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자결한다. 물론 드라마속 양심을 탑재한 이현은 픽션속 인물이다.
되풀이 되는 망조앞에서 애국의 기준과 명분이 모호한 역사의 최종 판결을 지켜본다. 어설프게 민주주의 랍시고 국민들이 조선말기의 망조를 다시 선택했고 그에 따른 묵은 카르마들과 원귀들의 원통함이 생생하게 재생돼어 튀어 나오는것이 가히 마무리로 접어든 말세기 답다.
https://youtu.be/b5YDEG8UDuQ?si=r1BMW6VGjtbHb64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