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生命]‘ 은 스스로 순환을 한다. 생명체에 올라타 감각을 통해 감정을 만들어내는 의식은 주어진 육체의 생명을 점차 자신이라 여기게 되는데 그것이 곧 ‘에고’이다.
개체성 존재인 에고는 자신이 올라탄 생명을 다룰수 없다. 노화와 병마에 무력하게 끌려다닌다. 주종관계로 에고는 육체의 상태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고 만족과 불만족 정도에 따라 행복감과 우울감으로 향한다.
자동차 연료 게이지에 붉은등이 들어온 상태에선 언제 연료가 바닥나 멈출지 조마조마한 상태에서의 운행이다. 고속도로에서 고급 외제차를 몰아도 여기저기 고장나 삐걱대는 와중에 연료가 바닥이면 당장 굴러간들 마음이 편할리 없고 어디든 갈수있는 만땅 소형차가 더 맘이 편하다.
노화는 기본적으로 연료 게이지의 붉은등이 주는 불안감과 우울감을 동반한다. 기본값이 불행과 불만족인지라 행복한 노년생활이 그리 말처럼 쉽지가 않다. 금전적으로 여유있고 사회적 가정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노화 자체가 주는 바닥난 연료 게이지의 우울감을 극복할수는 없다. 목적지 까지 얼마나 더 남아 있는지를 모를땐 더욱 불안한 법이다.
왜 모든 생명체는 ’영원[永遠]‘ 을 찾아 헤매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수억마리 살아있는 정충중에 한마리가 골인해 메이드 되어야 이 세계에선 비로서 생명체라 한다. 나머지는 버려지고 그렇게 순환되고 이어지는것이 생명의 고리다.
생명을 생명으로 내버려 두면 알아서 순환을 한다. 생명을 조율하고 생명과의 적절한 관계 설정이 영원이 하는일이다. 관리함에 있어 에고의 기분같은건 그리 고려할 요소가 아니다.
불만을 토로하는 에고의 허약함이 불만족 스러움에 영원을 만나고자 하는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함을 깨닫는다면 궂이 잘못된 길을 가지는 않게될것이다. 영원하지 않은것에 현혹됨이 도와 멀어지게 되는것이고 영원한 도를 추구함에 올바른 방향을 알게 되는것이다.
영원을 만나러 가는 길에 연료 게이지가 불이 들어왔다면 더욱 해매며 먼길을 돌아갈 여유가 없을것이다. 방향마저 잘못됐다면 부질없는 운행이다. 수억마리 정충중에 한마리가 메이드 된것이 그간 자신이 누려왔던 생명체 임을 안다면 (잘 살았노라 만세 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다 멈춘다해도 그리 억울하지도 아쉽지도 않을것이다.
https://youtu.be/xpYSb2QmdbA?si=v32kCak5pin_bL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