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기뻐하라 감사하라 말하였다.
스스로를 비참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한 생명체가 문득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수 있는가?
원해서 인가? 어쩔수 없는것인가?
삶을 기뻐해야 하는가 슬퍼해야 하는가?
무묘앙 에오처럼 우주와 생명 시스템에 대해 투정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산다는것이 기쁜가? 그저 죽지못해 산다? 의문의 핵심은 왜 존재하는데 행복 하지는 않는가? 입니다.
생명이 답을 합니다.
“기뻐하라 감사하라”
살아있음의 본질이 그러할진데 존재함에 궂이 이유를 만들어내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생명체는 반박을 합니다. 나의 현실이 이처럼 처절하고 고통 스러운데 기쁨과 감사가 명령한다해서 하게 되는것인가? 억지가 아닌가?
맞는말 입니다. 생명과 육체 사이의 중간자인 나 아이엠이 설명을 합니다.
생명체가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을 찾기위해선 육체가 고통 받아선 안된다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생존권이 위협 당할때 생명체는 생명의 본질인 기쁨과 현실적 육체 사이에 벌어지는 간격의 괴리를 실감하게 됩니다.
생명의 본질은 기쁨이라 할지라도 생명체가 그것을 인식하려면 생존을 위협 당하지 않게끔 기본 유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동물들에겐 먹이와 잠자리, 인간에겐 생존에 필요한 돈과 건강 입니다. 모든 생물체가 그 권리를 얻기위해 투쟁하고 일을 합니다. 그러다 점점 욕망에 끌려가 생명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것 입니다. 행복하기 위해 행복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는 모순이 발생되는 것이죠. 사회 시스템이 야만적일수록 아귀다툼에 휩쌓이고 구성원들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부자 나라 라고 해서 행복지수가 꼭 더 높지는 않습니다.
육체가 스스로를 생명 본질이라 착각할때 원망과 저주 에오이즘이 진리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엠 입장에서 생명체는 단지 생명을 담는 용기와 같은것 입니다.
살날이 일주일 남은 사람은 두가지 마음중 하나를 선택할수 있습니다. 물컵에 담긴 절반의 물과 같습니다.
살날이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 똑같이 주어진 일주일 이란 시간속에서 둘중 어느쪽 생각이 더 원하는 행복에 가까울지는 각자의 취향과 선택입니다. 슬프지만 값진 보물을 얻음에 행복할수도 있으니깐요.
기쁨과 감사는 하는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생명을 마주보고 느끼는것 입니다. 몸이 아프다 상황이 안 좋다해서 핑계대고 있지만 기쁨과 감사는 항상 업고 다니는 애와 같은것 이란걸 자각할때 생명체는 행복을 알게됩니다.
기쁨과 감사를 찾지 못하겠다는 핑계와 변명꺼리는 한개나 수백개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생명을 등에 업고 있고 자주 들여다 보고 기뻐하고 감사할수록 잠시 미룰수는 있어도 꺼내들지만 않았을뿐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생명을 지닌 모든 생명체들이 누려야할 기본권리 입니다. 그것을 찾는 도구가 기쁨과 감사이며 항상 등에 배낭처럼 업고 다니게 됩니다. 삶이 힘들더라도 숨쉴수 있는 잠깐의 여유마다 찾아보게 될때 생명체는 행복하다 느끼게 됩니다.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아귀다툼의 험난한 말세를 통과해 나가야 할 인류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할 한마디를 꼭 남겨야만 한다면..
존재 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쁜것을 ‘사랑’ 이라고 합니다. 생명과도 같아요. 사랑을 품은 사람이 그래서 행복한것 입니다. ‘스스로 사랑을 하세요 (Love With Me)’ 또 사랑은 나누고 방출할수록 기하급수 배가 됩니다. 기쁨을 누리고 감사하세요. 행복한 사람이 되세요. 아이엠 아멘 옴무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