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삶이란 말은 참 많이 들어보지만 자신이 그 말을실감하기란 쉽지가 않다. 나이가 먹고 노년이 돼도 마찬가지로 70먹은 노인도 십년을 더 살지 20년 30년을 더 살지 누구도 알수없어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애매모호 하다. 시한부 리미트를 모르면 막연히 ‘사는날 까지 열심히 산다’ 라는 애매모호한 마음으로 삶을 대하며 살게된다. 반면, 의학계 에서 통계로 알려주는 삶에대한 시계는 좀더 구체적이다.
나의 경우 별탈없이 갔을경우 최장 일년정도를 목표로 생명연장 항암을 하겠다고 하니 그 안에 숨쉬는 남는 시간이 결판난다 라는 말과도 같다. 이번에도 그래도 구체적 남은 시간 테두리가 주어졌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육체가 시간위를 떠도는 삶이란 시계를 그냥 남들이 하는대로 환경에 묻혀 탱자탱자 보내기엔 아깝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몇년전 까지만 해도 이쁜 새신발을 보면 앞뒤 안가리고 무조건 사모았다. 신발마다 분위기와 컨셉이란게 있어서 새로운 신발을 신고 그에맞는 옷차림으로 외출하면 바깥을 마구 돌아다닐 맘이 절로 생겨난다. 등산화를 신으면 산에 가고싶고 새 구두를 신으면 근사한 번화가 카페를 쏘다니고 싶어진다.
요즘 신발들이 품질이 너무 좋아져서 헤질때까지 신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가죽제품일 경우는 몇년을 신어도 그대로고 밑창도 거의 안닿는 단단한 신발들이 무진장 많다. 그런 연고로 이쁜걸 보면 사기만 해서 어느덧 신발만 60켤레가 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대부분이 개시할 기회도 얻지 못한채 박스에 그대로 담겨져 보관만 하게된다.. 맘에드는 신발만 하나 신어도 몇년은 낡은 기색 없이 끄덕 없기에 평생을 신어도 다 못신을것이 확실하다.
이번에 짐정리를 하면서 개시 안한 새신발들은 주위에 맞을만한 사람이 보이면 닥치는대로 나눠주었다.. 버리고 나눠주고 했는데도 30켤레는 남았다. 옷도 환자랍시고 추리닝 계열만 입다보니 전부 짐덩어리로만 느껴지는데 신발도 그러해서 막신는 운동화 한켤레만 신다보니 나머지는 바라보기만 하는 짐이 된다..
영화 ‘매트릭스’ 와 ‘ 언더월드’ 두편으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된 비주얼 신발 브랜드와 스타일이 있다. 영화의 흥행과 더불어 스페인의 작은 장인공방 브랜드에서 순식간에 세계적 브랜드로 떠올랐다. 매트릭스에서 선보인 ‘뉴락’ 계열 신발들은 마구 찢어진 청바지와 오토바이가 딸려있어야 제대로 분위기가 나는데 몇년전 까지만 해도 겨울철에 즐겨 신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차림을 하고 외출할 나이도 지나가고 환자가 되니 신을 기회가 전혀 생기질 않는다.. 워낙 컨셉이 튀어서 주위에도 그런신발을 누가 미쳤다고 일반 생활에 신냐고 조카 친구들 모두 필요없다고 거부한다.. 그저 다시 가죽계열 패션이나 찢어진 청바지에 신을 날이 오게되기를 꿈만 꾼다..
다른 신발들도 마찬가지.. 말기암 환자의 컨셉에 어울리는 신발은 환자복이나 추리닝에 어울리는 그냥 막 신는 평범한 운동화다. 운동화나 구두가 아무리 이뻐도 추리닝에는 어색하다.. 이미 그런 활기찬 일반적인 외출을 즐길수 있는 시간은 내 삶에서 멀찌감치 지나가 버린듯 하다..
이번에 항암을 하면서 육체가 얹혀진 삶이라는 시간이 마치 장난인듯 느껴졌다..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낸채 생활하는것도 말도 못하게 짜증나는데 쇄골을 찢고 포트까지 집어넣으니 몸에 호치키스 자국과 엉성하게 꼬맨 실 자국에 씻지못해 여기저기 난장판이 된 피부 망가진 육체를 보니 한숨이 나서 “이거 뭐야 장난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수 밖에 .. 항암제를 계속 몸안에 집어 넣고 있으려니 내 의지와 완전히 따로노는 육체의 통증과 감각으로 ‘이게 뭐하는 짓일까...’ 의식이 육체에서 붕 뜬채 마치 내몸에 삶이란 녀석이 이것저것 장난질을 치는것처럼 느껴진다..
여행을 갈수도 없고 사람들과 어울릴수도 없고 가족들과 스트래스 받는 생활속에 나머지 삶이란 시간들을 바쳐야 한다는것이 스스로 쉽게 인정 되지가 않는다. 내가 남은시간 동안 육체를 통해 즐길수 있는 삶의 분야가 책이나 영화보기 맛있는거 먹기 음악듣기 그냥 멍하니 명상에 잠기기.. 손꼽아 봐도 몇가지 되지가 않아 상당히 고민에 빠지게 된다.
육체가 누리는 삶이란 녀석은 항상 성적인 욕망과 식욕에서 자유롭지가 않다. 모든 이성을 마비시킨채 벌어지는 엽기적 성범죄 사건들을 보면 육체는 성욕 식욕에 노예적으로 종속되 있다고 봐도 된다. 그런 원초적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하면 육체가 누리는 삶이란 것이 왠지 시시하고 장난처럼 생각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육체는 갈등하고 방황하지만 내 의식은 그렇지 않다.. 그 중간 지점에서 냉철히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육체를 지닌채 보내는 삶이란 녀석이 어영부영 낭비되는것도 허용하기 싫고 쓸데없는 스트래스나 절망 놀이등을 할 여유도 생기질 않는다..
남은 삶이란 시간동안 최대한 자유를 누려야만 한다.. 사회적 관계와 욕망, 돈에서 자유롭고 성욕망과 식욕에서 자유롭고 고통과 통증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그런 규율과 억압속에 육체가 보내는 시간들을 인간들은 ‘삶’ 이라고 표현하는데 지금의 나에겐 그런 다른 에고들이 주장하는 삶이란것이 장난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그런것에 낭비할만큼 육체는 시간적 여유가 없고 육체를 통해 흘러가는 나에게 주어진 삶이란 시간이 나에겐 무엇과도 바꿀수 없을만큼 더없이 소중하다.. 에고들이 삶이라 주장하는 무겁고 스트래스 받는 낭비 소모적인 일로 귀중한 나의 삶을 휩쓸려 보내긴 싫다..
제한된 육체에 남겨진 나의 삶은 너무나 소중하다.. 새벽 세시에 일어나 커피와 흡연을 즐기며 곰곰히 남은 삶에 대한 ‘ 자유’ 플랜을 생각해본다.. 공기처럼 가벼운 삶.. 람타처럼 바람이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