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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h Sep 01. 2018

어린시절 만화방의 추억.

그시절의 만화들을 보고싶지만..


60년대 후반 생인 내가 열살이 채 되기전.. 동네마다 구멍가게 라는 형식의 생필품 가게들이 있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가게 들이 여러개 경쟁하곤 했다. 만화가게의 주 고객은 나와같은 열살 위 아래의 꼬마들이고 어떤 가게에서는 그런 꼬마아이들을 대상으로 떡복이 등을 함께 팔곤했다.


대부분의 만화가게는 살림을 겸하는 방이 딸린 구조여서 젊은 아주머니 (지금 생각해보면 30대 정도) 가 혼자 운영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대부분의 만화가게가 권수로 요금을 매기는 경우가 아닌 시간당 십원?백원? 정도의 요금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의자는 일자로 된 딱딱한 나무의자를 대부분 비치했다.


경쟁이 심해지면서는 구석진 곳에 위치한 만화방에는 ‘하루종일 십원 or 백원? (기억이..) 이라는 문구도 종종 보곤 했는데 정말로 하루종일 쳐박혀 만화를 보는 손님은 나 혼자인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는 주인 아주머니가 남들은 너처럼 보라고 해도 못본다며 이제 그만 가라고 내쫓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한국의 만화가들은 사회적으로도 대우가 형편 없어서 정말로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을 각오가 서있지 않으면 하기가 쉽지않은 직업이었다. 정말 만화가 좋아서 만화를 그릴수 밖에 없는 사람들만이 작가로 활동 하였는데 일본과는 문화단절 하던 시기여서 일본만화가 국내 들어오기는 불법복제로도 쉽지 않았다. 다만, 몇몇 만화가들이 개인적으로 들여온 일본만화를 그대로 그림과 스토리를 베껴서 한국 만화처럼 위장한 ‘짝퉁’ 만화들이 여러편 선보였다. 나중에서야 어릴때 보았던 만화 캐릭터들이 사실은 일본의 것이었다는것을 알아 차렸으니까..


그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만화는 시리즈로 에피소드가 여러편 선보인 작품인데 천상에서 90몇개의 구슬이 지상에 떨어져 그것을 찾으러 다니는 이야기 였다. 구슬이 지상에 떨어져 요괴들이 차지하고 있고 요괴들을 하나씩 물리쳐 구슬을 찾는 매편마다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자료를 찾을수가 없어서 그 만화가 무엇 이었는지는 알수가 없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한국의 컨텐츠 였을까.. 의심이 간다. 그 정도의 굉장했던 장편 명작을 기억하는 사람도 흔적도 없다는것은 믿기 힘들다..



어린시절 이런 작은 만화방의 추억이 있고 만화 산업은 70년대 잘살아보세 군인들의 정치적 철퇴를 맞고 거의 종결.. 사라져 버린듯 기억속에 없다. 박정희 정권은 만화를 너무 싫어해서 아예 없애 버리려고 했던것 같다.. 그 다음은 소년중앙, 새소년, 어깨동무 등의 어린이 잡지에 연재되는 만화들을 주로 봤다. 길창덕의 꺼벙이, 윤승운의 요철 발명왕등. 특별부록이 뭐냐에 따라 두가지 잡지중 어떤것을 사는가가 정해졌다.


 다음 정권인 5공화국때는 애들이 싸우는 만화를 보게해선 안된다며 아예 로봇 만화를 TV에서 금지 시켜서 남자 애들이 졸지에 순정만화만 봐야했던 기억도 있다... 싸우는 만화를 보고 자란 애들이 자라면 데모 한다나.. 뭐 그런 이유였다.. 초등학교 6학년때 최초로 사모았던 단행본이 ‘동짜몽’ (‘원제:도라에몽) 이었고 김형배 작가의 로보트 태권브이, 황금날개등의 단행본과 여자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유리가면’ ‘캔디캔디’ 에 빠져 살았다. 표지 디자인이 똑같은 새소년 시리즈 에서 나온 만화들을 사 모았던것 같다.


다시 만화방 열풍이 불기 시작한건 80년대 후반인데 ‘심야 만화방’ 이란 것이 유행했다. 한쪽에는 만화방에서도 음지에서만 기생하던 ‘무협지’ 장르책들이 있었고 박봉성 고행석 이현세 등의 공장에서 찍어내는 신간이 매일 카운터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 사이사이 일본의 성인 불법 복제물들도 정식 출간된양 버젓히 출간되고 있었는데 보고도 못본척 국민들에게 3S(Sex,Sports,Screen) 를 허용해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던 시절이어서 가능했다. 한국영화는 여배우 옷벗기기로 승부하고 각 가정에 비디오가 보급되면서 비디오 대여점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프로야구가 등장하고 해외여행 자유화, 유흥업소 심야영업 해제등 향락 문화를 적극 장려하면서 정치에 관심갖지 말라는 우민정책을 펼쳤지만 데모도 가장 격렬했던 시기다.


이때는 만화를 보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역주변과 술집들 사이에 들어서 갈곳없는 노숙자 백수들이 하룻밤 묶을 장소로 심야 만화방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밤12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요금은 천원, 찜질방이 없던 시절이다.) 심야 만화방은 담배연기와 여기저기 술취해 쓰러져 자는 사람들로 아이들과 여자들은 도저히 발을 들일수가 없는 범죄의 현장 그런 분위기 였다. 한국영화 ‘아저씨’ 에서 납치한 아이들을 가둬두는 장소가 심야 만화방으로 나오는데 딱 그 분위기 이다.


나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대를 입학하자마자 휴학하던 백수 시절이라 일주일에 서너번은 밤에 오로지 만화를 보기위해 시장안의 가게로 출근했던 기억이 있다.한국식 공장에서 나오는 만화들을 주로 봤는데 고행석 불청객 시리즈를 정말 재밌게 봤다..


그 다음으로 80년대 말, 대학생활 할때는 비교적 깔끔한 분위기의 만화방들이 들어서 시간날때 가끔씩 낮에 이용해 일본의 불법복제 만화들을 봤다. 정식으로 일본 만화들이 출간되기 시작한 90년 초반 시기에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만화를 같이 대여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어서 만화를 빌려보기 시작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베르세르크, 닥터 노구찌, 맛의 달인등... 그 당시 방안에 쌓아놓고 즐겨보던 만화들이다. 그 이후는 25년 정도 만화와는 담을 쌓고 지내다 요즘들어 다시 만화책을 보기 시작하는데  젊은 시절에 보던 작품들이 아직까지 끊임없이 연재가 이어지고 있고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든다. 만화책을 살펴보러 서점에 갔다가 백 몇십권에 이르는 맛의 달인을 보고 질려서 지금은 보는것을 포기... 베르세르크는 몇십년간 이제 겨우 30몇권인가 나와서 조용히 사모으기를 시작하는 중이다..



요즘은 도서 대여점도 몰락하고 만화 카페라는 것이 등장해 깨끗한 분위기로 연인들이 같이 즐길수 있는 형태로 운영중인듯 한데 환한 양지에서 고상하게 만화를 보고싶다.. 는 나와같은 열망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아져서 가능한 일 같다. 우리세대는 연인이 만화가게를 같이 가게되면 여자들은 손가락질 받던 세대여서 여자들은 대부분 기다리는 자기 남자친구가 대기하는 대기실로 사용하는 정도였다..


지금은 혼자라 집에서도 인터넷 등을 통해 얼마던지 원하는 만화를 볼수있기 때문에 혼자 만화카페를 궂이 갈 이유가 없어 가보진 못했다.. 만화카페의 등장은 음지 문화였던 만화가 한국에서도 점점 양지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 환영하지만 유행이 어떻게 변할지는 지켜봐야 알겠다.. 한국은 나같은 중년은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로 너무나 격동적으로 젊은 문화가 확확 변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심하지는 않다.


Loveholics : Butterfly MV「국가대표_OST」

https://youtu.be/54Tz7erlb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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